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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노을 Feb 10. 2022

29살 사회

노화라는 상수, 노화의 양태라는 변수 사이에서 어떻게 늙을 것인가. 

거리에 관하여

 필자는 개신교를 믿는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간다. 엄숙한 분위기의 설교 중 누군가의 기침은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짜증과 걱정이 그것이다. 전제는 존재한다. 기침하는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 그것이다. 짜증은 그와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 때 촉발되는 감정이다. 걱정은 그와의 정신적 거리가 가까울 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물리적 거리와 정서적 거리는 사랑을 나눌 때도 적용가능한 개념이다. 연인간의 성교는 물리적 거리를 ‘0’으로 수렴시킨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와 정신적 거리는 별개이다. 성교 중 몸을 공유하는 이가 정신에서 다른 이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런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 가지의 독립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관계는 물리적 거리와 정신적 거리가 일치하는 관계이다. 누군가와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 때, 그의 입장이 될 수 있다면 이는 정신적 거리도 ‘0’에 수렴했다는 뜻일 것이다. 다른 곳에 있는 연인이 서로를 떠올린다면, 물리적 거리가 정신적 거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에게 신발을 선물하면 떠난다는 말이 존재한다. 신발은 물리적 거리를 늘리는 도구이다. 정신적 거리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물리적 거리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 끝은 이별이다. 역도 성립한다. 대표적 예는 시선의 이동이다. 연인과 있으면서 다른 이를 쳐다보는 것, 그 끝 역시 이별이다. 그렇다면 물리적 거리가 굉장히 멀다면? 이때는 정신적 거리도 먼 것이 행복에 좋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앞서 서술한 내용을 과감히 일반화하려고 한다. 즉, 물리적 거리와 정신적 거리 사이의 괴리를 줄이는 것이 건강하다는 생각을 일반화하겠다는 것이다. 물리는 물질 세계에서만 일어난다. 그리고 물질 세계는 현실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정신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전제로 한다.(여기서 말하는 정신은 유물론적 관점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세상, 이상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래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줄이는 것이 당신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당신을 행복으로 이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현실과 이상

 우리는 현실을 살며, 이상을 꿈꾼다. 누군가는 현실을 이상에 맞추려고 한다. 넬슨 만델라를 비롯해서 마하트마 간디,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 세종대왕, 나폴레옹, 톨스토이 등의 수많은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역사 속 수많은 나머지는 이상을 현실에 맞춘다.

 당신은 둘 중 어느 그룹에 속하는가. 현실을 이상에 맞추는가. 아니면 이상을 현실에 맞추는가. 당신이 속한 사회는 어느 그룹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당신을 품고 있는 사회는 어느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전자라면, 그 사회는 아직 젊은 사회이다. 젊은 별처럼 찬란한 미래를 아직은 보여주고 있다. 반면, 후자의 길을 밞고 있는 사회에 당신이 속해 있다면, 어서 그 사회를 떠나라. 그 사회에 몸 담고 있는 것은 곧 터질 별에 거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마, 우리사회를 사는 사람 중 일부는 대한민국을 후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헬조선이라는 말, 이민이 답이라는 말, 이런 말이 횡행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폭발 조짐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대한민국이 아직은 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젊음은 아니다. 아마 29살의 젊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20대라고는 하지만, 30살에 가까운, 젊다고는 하지만, 예전의 몸이 아닌, 그런 29살의 상태가 우리사회의 젊음이다. 

  어려질 순 없다.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픽 법칙이 강하게 말한다. 시간은 비가역적이라고. 물리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시간의 비가역성을 설명할 순 있다. 뜨거웠던 대한민국, 혈기왕성한 대한민국을 주도했던 젊은 세대는 지금 기성세대가 되었다. 그들은 사회의 노화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느낀다. 세상이 변했단 것을, 그리고 그들이 예전만큼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노화는 막을 수 없다. 현대의학에서 활성산소를 없애는 등의 치료방법이 나오긴 하지만,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은 아직 갈 길이 멀고 험하다. 물론, 해결책이 없진 않다. 필자는 이런 방법을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곱게 늙는 것'.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인륜적인 태도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성적인 태도는 아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이만큼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을 존중하는 것이 결국, 미래의 본인을 존중하는 것임을 아는 이성적인 사람들은 '곱게 늙어가는' 어르신을 존중의 태도로 대한다. 곱게 늙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나이에 비례하는 품격을 겸비해야 한다. 겸손, 인품, 지식, 지혜, 경험이 모두 필요조건에 해당한다. 동시에 자립성도 보여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갖춘 자에게만 그러한 칭호가 내려진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의 노화는 자연스럽다. 아니, 필연적이다. 다만, 어떻게 늙어갈지는 항상 변수로 남는다. 


지금 29살인 우리사회는 성숙해지고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도 그에 따라 성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과속 운전을 하는 우리사회의 노화는 빨라질 것이다. 그에 맞춰 우리도 늙어가기 시작한다. 당신은, 그리고 우리사회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곱게 늙을 수 있는가. 우리 사회가 적절한 품격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회 속의 당신은 그에 걸맞는 품격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글의 초반부에 거리에 관한 말을 괜히 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높은 품격을 가졌다면, 사회도 높은 품격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행복이다. 반면, 당신이 낮은 품격을 가졌다면, 사회도 낮은 품격을 가져야 한다. 사회의 품격 수준은 낮은데, 당신의 그것은 높다면? 당신은 가택에 구금된 갈릴레오가 될 것이다. 사회의 품격 수준은 높은데, 당신의 그것이 낮다면? 당신은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루이 16세가 될 것이다. 


당신의 품격과 사회의 품격을 비교해보는 것은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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