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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노을 Feb 16. 2022

문득 든 생각.

#구성주의 #변증법 #관용 #K 

 조정래는 한강을 보고 20년의 역사를 떠올렸다. 봉준호는 한강을 보고 괴물을 떠올렸다. 박정희는 한강을 기적의 탄생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명박은 사업 아이템으로 손색없다는 생각을 한강을 보며 했다. 누군가는 한강에서 삶을 마치며, 누군가의 운명적 만남은 한강에서 시작됐다. 누군가는 한강을 보며 하루의 고단함을 마치며, 누군가의 고단함은 한강에서 발생한다. 한강을 보며 우리는 저마다의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동상이몽(同床異夢). 이 현상을 이보다 간결하고, 명쾌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의 생각을 갖는다. 똑같은 세계에 살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으로 점철되는 사회, 유지와 변화 사이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사회,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은밀한 기싸움이 존재하는 사회, 죽음과 삶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회, 유신론과 무신론의 서로를 향한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 세상을 향한 혁명과 세상을 위한 보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로 형성되는 세계. 동상이몽! 

 이런 세계에 정답이 있을까.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알겠지만 세상에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구성주의라고 한다. 모든 것이 구성에서 비롯된다는 것, 즉 당신이 직장과 가정, 인간관계와 개인의 고독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듯 구성주의는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본다. 이 사조의 매력에 빠질 듯 하면서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규칙은 존재할까? 윤리는 있을까? 법은? 정의는? 보편은? 일반은? 평균은?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정말 없을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칸트의 정언명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쇼펜하우저적 회의, 니체적 승화, 사르트르적 실존, 데카르트의 좌표, 베이컨적 상상, 조지 오웰적 풍자.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직관적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구성주의의 모순을 말이다. 모든 것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구성주의 그 자체의 존재도 부정되어야 한다. 자가당착적 모순을 범한 것이다. 이보다 단순하게도 알 수 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노트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당신은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 실재한다. 우리의 생각도,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도, 우리를 감싸는 주변환경도 실재한다. 그렇다면 구성주의는 잘못된 이론인 것인가.

 구성주의가 잘못됐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개똥도 약에 쓰이듯이, 세상 모든 것은 나름의 쓸모를 갖는다. 구성주의의 쓸모는 '관용'이다. 똘레랑스로 유명한 관용의 정신은 '그럴 수 있음'을 되새기게 한다. 노트북이 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태블릿의 편의성을 역설한다면, 노트북 옹호론자는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게 관용이다. 이러한 관용에서 변증법이 등장한다. 노트북이라는 테제(정), 태블릿이라는 안티테제(반), 그 둘을 합쳐서 나온 진테제(합), 2 in 1. 관용은 창조를 가능케 한다. 이는 창조가 없는 곳엔 관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회가 다른 사회의 사례를 답습만 하고, 모방만 하고, 일차원적 변형만 가한다면, 그 사회는 관용이 없는 사회일 것이다. 대표적 사례는 당신이 살고 있는 곳, 대한민국이다. 교육제도는 미국의 것이다. 정치 제도는 대통령제에 1차원적 변형만 가한 것이다. 군사제도, 경제제도, 복지제도, 어떤 것을 살피더라도 창조는 없다.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창조의 결과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한글이나 궁궐, 인쇄물 정도? 대통령이 선출되면 기존 정권에서 힘들여 추진한 것은 폐기물로 처리된다. 토론에서 인정의 자세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은 선이고 타인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태도는 사회에 만연하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사고 방식은  DNA에서 발현되는지 궁금하다.  

 Kpop, K방역, K드라마... 온갖 것에 K를 붙이는 행태는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관용없는 사회로 보여지기 싫은 한국사회의 과장이랄까. 독일,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캐나다, 미국, 일본 등의 국가는 다양한 선례를 가졌다. 그것들을 참고하는 것은 옳다. 다만, 한국식의 무언가를 논의하는 과정이 생략되지 않으면 좋겠다. 유례없는 발전을 보여준, 인구에 비해 수많은 유명인사를 배출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K라는 알파벳에만 담아내는 것은 자존감의 부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만약, 우리사회에 관용이 존재한다면 제대로 된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 조건은 갖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헬조선'을 떠나야겠지... 당신은 티켓을 준비할 텐가, 나라를 바꿀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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