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침 노을 Feb 15. 2022

나훈아의 오류?!

구심력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테스형!, 나훈아 -


KBS에서 주최한 나훈아 콘서트, 그곳에서 불린 신곡 <테스형!>은 대한민국을 소크라테스 열풍으로 몰았다. 세상이 살기 힘들어서 소크라테스에게 한탄하는 노랫말은 대중의 애환을 대변한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생각하면 나훈아는 오류를 범했다.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걸 물어보는 행위는 석가모니에게 교회 다니면 천국 가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행위이다. 말도 안 된단 뜻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서양철학의 역사는 고대, 중세, 르네상스, 실존주의 ... 현대까지 광범위함을 보인다. 그중 고대와 중세를 한 묶음, 그 외의 것을 한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기준은 철학적 대상이 무엇인지이다. 전자의 경우, 인간 외부에 집중했다. 밀레토스의 탈레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등의 철학자는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국가는 무엇인지, 정의를 어떻게 정의할지, 자연법은 어떤 규율을 말하는지 등 인간 외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후자의 경우, 인간 내부에 집중했다. 니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자나, 인간에게 집중한 수많은 르네상스 철학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은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인간 삶의 본질은 무엇이며 우리는 왜 고통을 느끼는지 등 인간 내부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고, 그에 대한 느낌표를 찾았다. 이상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서양철학를 이끈 힘이 원심력에서 구심력으로 이동했다. 


 눈치챈 분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은 사회흐름에 순행하기도, 역행하기도 한다. 그리스든, 에게해 주변이든, 영국이든, 프로이센이든, 라틴아메리카든, 미국이든 시류에 정통으로 맞선 사람은 존재했다. 그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인간 주변에 집중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인간 내면에 집중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이는 델포이 신전에 써 있는 경구였다. 출처가 어떻든, 이는 그의 철학 전부를 보여준다. 그의 친구는 델포이 신전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똑똑하다.' 친구의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충격에 휩싸인다. 아는 게 없는 자신이 어떻게 똑똑한 사람인가. 그것도 아테네 전역을 통틀어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지식인 집의 문을 두드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깨닫는다. 신탁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가 똑똑한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의 무지를 무지하지 않은 것,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 것, 인간 무식함을 알고 있는 것, 그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들에게 필요한 말이었고,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 사명감을 느꼈다. 그는 산파술을 사용했다. 산파는 산모의 출산을 돕는 사람인데, 그가 지식의 출산을 도와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지 싶다. 산파술의 핵심은 질문이다. 가령,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 반인륜적 행위라는 말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인지 모르고 죽인 것과 신탁을 두려워하여 아들을 버리라고 하는 것 중 무엇이 반인륜적입니까. 신을 닮은 것이 인간이라면, 신의 뜻대로 한 그들의 행위는 반인륜적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끝은 하나이다. '나는 무지하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질문과 성찰을 이끈 그의 철학은 구심력의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이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진 않았겠지만, 그의 시선은 항상 자신을 향했다. 그런 그에게 세상이 힘들다고 한다면, 당신의 생각을 물었을 것이다. 세상이 왜 힘들다고 생각하는지, 당신은 힘든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같은 질문 말이다. 또는, '본인의 희생으로 힘든 세상이 없어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이 돌아올 수도 있다. 



!

글을 쓰고 테스형의 가사를 다시 한 번 읽었다. 나훈아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테스형!, 나훈아 中-


이렇게 끝나는 그의 노래는 소크라테스가 대답해주지 않을 것을 알고 쓴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정말 힘들 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의 슬픔, 그의 가사가 말하는 것이 그것이었던가. 방안에서 죽은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가 왜 이런지, 그곳은 행복한지를 묻는 누군가의  쓸쓸한 뒤태의 상()이 그려진다. 


 한국 문학의 대표적 정서는 '한'이다. 한은 하고 싶은 것을 못 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김소월과 정지용,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서는 그들 나름의 한이 드러난다. 나훈아의 <테스형!>도 그렇다. 겉으론 웃어 보지만 속으론 웃을 수 없는 가면 쓴 자들의 한, 아무리 말해도 답을 듣지 못하는 자들의 한, 삶의 소중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자들의 한, 그것이 우리네 한이 아닐까. 당신의 한은 어떠한가. 당신의 물음에 답해주는 이가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전 09화 늙는다고 어른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