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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부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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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Aug 21. 2023

멸치볶음, 그것은 내리사랑의 증표

각자의 손맛은 달라도 자식 사랑은 하나

딸들이 어렸을 때는 멸치볶음을 자주 만들었다. 바삭하게 볶아 놓으면 과자처럼 주워 먹느라 식탁에 올리기도 전에 사라지곤 했다. 다른 반찬 없이도 밥 먹이기 수월했으니 그만한 밑반찬이 없었다. 

요즘은 멸치볶음을 잘하지 않는다. 육수용을 빼고는 멸치 사는 일도 드물다. 남편도 좋아하는 반찬이지만, 식탁에 올린 지 꽤 오래됐다.    

  

“어머니, 멸치볶음 맛있어요! 싸가도 되죠? 오빠 갈 때 챙겨주려고요.”

주말 부부로 사는 올케가 엄마의 멸치볶음을 탐냈다. 엄마는 아들 챙기는 며느리가 이쁜지 “그래라, 그래.” 하며 통째로 들려 보낼 준비를 한다. 반찬을 뺏기고도 입이 귀에 걸렸다. 퍼주는 기쁨을 아는 사람의 미소는 사랑스럽다.     


“으음~ 역시 할머니 멸치볶음은 끝내줘!”

누워있던 우리 집 둘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찬사를 보냈다. 경추 이상으로 일어나 걸을 수 없었던 응급 환자 같지 않았다. “서 여사, 이 맛이라니까! 이렇게 좀 볶아주라.” 처가를 자기 집으로 착각한 남편 때문에 내 멸치볶음은 의문의 1패를 당했다. 여동생도 한 젓가락 집어 먹더니 “엄마, 나도 싸 갈래.” 한다.

아빠 생신이라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하던 중이었다. 상에 올라온 갖가지 먹음직스럽고 귀한 음식을 제쳐두고 느닷없이 멸치 전쟁이다. 밥상을 치울 때까지 멸치볶음을 몇 접시나 퍼다 날랐는지 모르겠다. 별다른가 싶어 먹어봤다. 와! 짜지도 않고 촉촉한 게 예술이다.   

  

엄마는 요리 솜씨가 좋다. 사는 일이 바쁘고 고단해도 끼니마다 맛있고 정갈한 밥상을 차려냈다. 그 덕에 우리 4남매는 보약 같은 집밥을 먹고 자랐고, 나는 음식 맛 좀 볼 줄 아는 미각을 얻었다. 세월이 흘러 일곱 손주의 할머니가 됐어도 엄마 손맛은 그대로다. 

학창 시절, 늘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도시락 뚜껑을 열던 그 순간의 희열을 중년이 된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 몫의 반찬이 사라져도 친구들의 “한 입만!” 소리에 어깨가 으쓱했던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그때도 반찬통 한 칸에는 차르르 윤기 흐르는 멸치볶음이 있었다.    

 

우리는 엄마 집 냉장고를 다 털어낼 기세로 각자 제집으로 가져갈 것들을 싸고 또 쌌다. 들기름, 장아찌, 김치, 생선, 과일.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금은보화 가득한 흥부네 요술 박 같았다.

나는 동생들에게 멸치볶음을 양보했다. 할머니 멸치볶음을 최고로 치는 내 딸을 위해 ‘아줌마 파워’를 보여줘야 했으나 언니라서 점잖게 굴었다. 사실, ‘저깟 멸치볶음쯤이야!’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자식들의 도둑질 현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가 내 다리 밑으로 검은 봉지를 슬쩍 밀어 넣었다. 먹기 좋게 손질된 갈치와 장어였다. ‘갈치 귀신’인 여동생이 눈치채면 낭패다. 엄마 입장이 곤란해지기 전에 서둘러 작별 인사를 하고 친정집을 나왔다.      




“엄마가 집에 가서 멸치 볶아줄게.”

딸에게 미안해서 집에 도착하면 멸치부터 볶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래 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육수용 멸치를 사러 가서야 생각이 났다. 아이고야, 이놈의 정신머리! 머리를 쿵 쥐어박고는 멸치 한 봉지를 장바구니에 담아왔다.     


멸치를 샀다고 바로 반찬을 만들 수는 없었다. 언제나 예고 없이 일은 들이닥치는 법. 갑자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딸은 신생아처럼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래도 계절 학기 수업을 들어야 했다. 이른 아침 첫 진료를 받고 내 차에 누워 2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에 갔다. 나는 학교 근처 카페에서 사장님 눈치를 보며 대기했다. 사람들이 퇴근하기 시작할 때 수업도 끝났다. 늘어선 차량과 쏟아지는 장맛비를 뚫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멸치 볶을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김치도 떨어졌지? 다음 주에 멸치랑 같이 챙겨줄게.”

휴대폰에 ‘멸치 타임’이라는 새로운 알람을 추가했다. 하필 나는 알람이 울리기 몇 시간 전 산부인과에 갔고, 다음 날 자궁 내막 수술을 했다. 의사는 여섯 개의 폴립을 떼 냈고, 일주일 후에 조직 검사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해본 적 있는 수술이라 암일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씩씩하게 통원 치료를 하며 결과를 기다렸지만, 자려고 누우면 기분이 가라앉았다. 낮에는 괜히 안 입는 옷들을 꺼내서 버리기도 했다. 마음이 전 같지 않았다. 수술 후유증으로 ‘밥 하기 싫어!’ 병이 생겼다. 냉면도 시켜 먹고 죽도 시켜 먹었다. 남편한테 당당히 밥 하라고 시켰다. 멸치볶음은 기약할 수 없었다.     


“여보, 오후 4시쯤 광주 갈 건데 같이 갈래?”

화요일, 출근한 남편에게서 카톡이 왔다. 조문 길에 같이 가자고 했다. 마침 장례식장이 딸 집과 가까웠다.      

“잘 됐다! 김치 떨어졌다는데 가져다줘야겠어.”

나는 카톡 창을 닫고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산삼 뿌리를 생으로 씹어먹은 사람처럼 갑자기 힘이 났다. 이걸 어째!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 ‘밥 하기 싫어!’ 병을 앓는 동안 장 보러 간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뭘 만들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묵은지를 길이 맞춰 썰어 담고, 소고기뭇국을 끓였다. 입 짧은 딸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밑반찬은 깻잎장아찌와 멸치볶음. 냉동실 깊숙한 곳에서 숙면 중인 멸치를 깨웠다. 드디어 멸치를 볶는구나! 이게 뭐라고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엄마처럼 견과류를 넣지 않고 볶기로 했다. 대신 딸이 좋아하는 편 마늘과 풋고추로 맛을 냈다. 달군 팬에 멸치를 볶아 비린내와 수분을 날리고 체에 옮겨 잔 가루를 털어냈다. 짜지 않게 최소한의 간을 하고 들기름도 듬뿍 넣었다. 설탕과 올리고당을 줄이고 시어머니 표 조청을 넣었더니 윤기가 예술이다. 평소보다 열 배는 더 정성을 들였다. 촉촉한 게 적당히 달면 고소하다. 딸이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반찬통에 옮겨 담고 보니 뿌듯하다. 겨우 멸치볶음 하나에 행복이 차올랐다.


“여보, 장례식장 못 갈 것 같아!”

점심 무렵부터 장맛비가 점점 요란해졌다. 이대로라면 못 가겠다 예상했지만, 막상 남편의 전화를 받고 나니 허무했다.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나는 멸치볶음에 환호할 딸을 생각하며 신났었다. 들떠 있던 기분을 가라앉히려면 뭐라도 마셔야 했다. 끊겠다고 다짐했던 커피믹스를 두 잔이나 마시고 말았다.    

 



그날 저녁, 남편의 밥상에 멸치볶음을 올렸다. 

“멸치볶음, 진짜 맛있다!”

“이거 원래 자기 거 아니거든!”

“냉장고에 한 통 더 있던데 뭘.”

“그래도 숟가락으로 퍼먹지 말고 젓가락으로 조금씩 먹어.”


딸이 오려면 이틀이나 더 남았다. 나는 남편에게서 멸치볶음을 지키려고 ‘리필 금지령’을 내렸다. 대신 콩나물 냉국을 아낌없이 퍼줬다. 아무리 생각해도 멸치볶음은 '내리사랑'이다.   

  

딸은 꼬박꼬박 월세 내는 제집을 두고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집에 온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버스 타고 집에 온 딸은 배고프다며 밥부터 찾았다. 나는 신의 속도로 멸치 통 뚜껑을 열었다.


“엄마, 완전 맛있어!”

“맛있지, 맛있지? 내가 너한테 갖고 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게.”

“음, 근데 할머니 거랑 조금 다르다. 역시 할머니만의 한방이 있단 말이지.”

“헐, 뭐래? 먹지 마, 먹지 마!”


상처받지는 않았다. 우리 엄마한테 진 거니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외칠 타임이지만 워낙 제 엄마의 지성미를 단속하는 딸이라 입 꼭 다문채 고상 떨며 밥상을 지켰다. 


“엄마, 멸치볶음 레시피 좀 불러봐!”

다음 날,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멸치볶음 레시피를 요구했다. 엄마는 “뭐 없어! 그냥 볶는 거제.” 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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