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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늠 Dec 04. 2022

믹스커피

잊을 수 없는 밥상

 17층에 살았다. 한 층에 7가구가 거주하는 복도식 아파트였다. 아이들이 배밀이를 하며 바닥과 창을 핥고 다니던 시기, 16층 아주머니가 처음 벨을 눌렀다. 부엌과 거실이 일자로 연결된 구조로 거실과 부엌 사이에 문을 떼고 살았는데, 얘들이 굴리며 놀던 공이 그 턱에 자주 부딪혔다. 아주머니는 집에 수험생이 있으니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 내 뒤로 아기 둘이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쌍둥이예요?”라며 놀랐다.


 그 뒤로 아주머니의 방문은 계속되었다. 갓난쟁이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아파트 놀이터와 주변 산책을 다니다 들어갔지만, 우리가 갈 곳은 집뿐이었다. 아주머니가 연속해서 두 번 올라왔던 날, 현관문을 연 나는 아주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럼 아이들을 묶어둬요? 저 요즘 종일 밖에 나가 있어요. 조금 전에 들어왔는데 매일 올라오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늘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던 내가 화를 내자 그녀가 역정을 냈다. 복도가 울리도록 언성을 높여 싸웠다. 그 후로 그녀는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1층으로 이사 가고 싶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들이 이제 뛸 텐데... 뛰게 하고 싶었다. 오븐에 빵이라도 구우면 바퀴벌레가 쏟아져 나오는 낡은 아파트를 벗어나 새 아파트에서 살고 싶었다. 17층 집을 사느라 빌린 5,000만 원을 갚는데도 오 년이 걸렸는데, 갈 수 있는 데가 없었다. 견본 주택을 구경 다니다 북한과 더 가까운 땅에 짓는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아이들이 36개월 되던 해 10월, 우리는 필로티 구조의 아파트 2층으로 이사했다.


 생애 첫 새 아파트로 이사 간 날, 잠든 아이들을 남편과 한 명씩 안고 현관문을 열었다. 잠에서 깬 아이들에게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라고 속삭이며 집안을 보여주었다. 품에서 내려놓자 쭈뼛대며 거실을 둘러보던 아이들에게 “막 뛰어! 여기선 막 뛰어도 돼!”라며 온 집안을 함께 걷고 뛰었다.


 벅찬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대출금과 생활비를 제하고 만 원 미만의 돈이 남는 달이 몇 달 이어지자 정신이 피폐해졌다. 시골이라 어린이집 원비도 저렴할 줄 알았던 난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라도 보내려면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 공동현관을 나가면 뒷산과 이어지는 아파트에서 매일 산을 오르며 흙과 함께 키우리라는 마음은 옅어지고 엑셀 가계부의 마이너스 지출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산업단지가 배후에 있었지만, 해당 경력이 없는 30대 중반의 유부녀가 원서를 넣을 곳이 없었다. 당시 내가 본 회사의 조건은 정시 퇴근이 가능한 주 5일제, 버스로 출퇴근이 가능한 곳이었다. 겨울이 되도록 취업은 되지 않았다.


 면접하러 가면, “아이가 쌍둥이네요, 애들이 아직 어린 데 야근이 가능한가요? 차가 없는데 어떻게 출근할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야근은 가끔이라면 괜찮고, 애들 원비 때문에 돈 벌러 나오는 거고, 취직만 되면 어떻게든 출퇴근 방법은 찾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에만 있으려니 공부한 게 아까워 이제 일하고 싶다는 이상적인 답변을 했다. 출근하라는 회사는 없었다. 왠지 느낌이 좋았던 회사의 면접 후, 연락이 오지 않아 극도로 우울했던 12월 초였다. 애들에게 괜히 푸닥거리하고 울다 잠들었던 날이었다. 남편의 출근 후 잠에서 깨 거실에 나가니 식탁에 상이 차려져 있었다.


 삶은 숙주 위에 돼지고기볶음을 올린 대 접시와 꼭지 뗀 딸기로 테두리를 두르고 멜론 슬라이스로 가운데를 장식한 접시, 팔 등분 한 감을 나선처럼 두르고 토마토를 중심에 넣은 접시, 그리고 밑반찬 세 개를 담은 접시였다.


내 생일상이었다.

커피믹스를 뜯어서 부어놓은 잔에 랩이 씌워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상을 차린 후, 커피를 뜯어 잔에 담고 랩을 둘렀을 남편이 그려졌다. 눈물이 고였다.  


 

 그를 나에게 소개한 아는 동생은 소개팅 당일 그와 내가 동갑이라는 걸 알고, “그냥 친구 해.”라고 말하며 나에게 미안해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옆의 2층 경양식집에 도착하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하고 온 그는 아버지 양복을 빌려 입고 나온 고등학생 같았다. 입사한 지 3개월이 안 되었다고 했다. 편하게 몇 번 만난 후 렌즈를 빼고 눈 돌아가는 안경을 쓴 나를 보고 식겁할 줄 알았는데, “잘 들어갔어?”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너랑 난 친구 이상은 아니니 그만하자는 낌새를 주었는데도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전화하는 그가 이상했다. 딸은 아버지와 비슷한 남자를 만난다는데, 그는 나의 원가족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았다. 내가 만났던 남자들과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고향은 서울이고, 모든 연고지가 수도권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그와 결혼하면 친정과 멀리 떨어져 살 수 있었다. 불순한 의도를 깔고 그와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자기 가족에게 헌신적이었을 그의 아내가 나라는 게 가끔은 웬 행운인가 싶다. 신혼 초 감정이 솟구쳐 폭탄처럼 터져버리곤 제풀에 놀라 멋쩍어하거나 우는 나를 남편은 말없이 바라봤다. 덩달아 화내는 일도 없이, 내가 하다 만 집안일을 대신하고 내 등을 토닥였다. 조용히 출근했다가 오후 무렵 전화를 해 밥은 먹었는지 확인했다.


 그때 신경 써서 차렸을 생일상에서 커피믹스에 감동했다고 말하니, 그가 “자기가 그 커피 좋아했잖아”라고 말한다. 고요했던 그도 이제 나처럼 화를 낸다. 그가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 날, 무서워졌다. 그가 나와 닮아가는 것 같아 내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기분 나쁜 건 말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피할 건 피하고, 상대가 싫어하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손잡고 걷는 부부로 살려고 노력한다. 결혼 후 20년이 넘도록 서프라이즈를 할 만큼 요리 실력이 늘지 않는 나를 타박하지 않는 그가 여전히 신기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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