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의 단상
지난해 이런저런 강좌와 모임을 통해 만난 이들에게서 칭찬을 자주 들었다.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의 칭찬을 듣고 슬쩍 기분이 좋아졌다가 칭찬이 반복되면 “나 그런 사람 절대 아니에요”라고 완강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런 반응에 상대가 당황하는 몸짓을 보이거나 분위기가 냉각되는 경험을 몇 번 한 후 생각해보았다. 나는 왜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나. 칭찬을 들으면 군중 속에서 주인공만 클로즈업되며 주변의 소리가 사라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야. 나에게 하는 소리일 리가 없어.”라는 소리가 머리를 채우고, 칭찬의 말이 줌아웃되어 버린다.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마음은 동양의 겸손과 겸양의 정신이 몸에 익어 그런 게 아니다. 중앙일보 기자인 이영희가 쓴 에세이를 읽다 그 이유를 짐작해보았다. 씁쓸한 일상을 묘하게 돌려 까면서 쓰는 작가인데, 유머에 배어있는 은근한 자학이 취향에 맞아 내 책장에 소중히 꽂혀있다. 그의 두 번째 책을 받아 들고 목차를 살펴보다가 눈길이 가는 페이지를 펼쳤다.
글을 잘 쓰고 싶었던 이유, 지금 글 쓰는 기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저자는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을 흠모했다. 선생님 눈에 띄고 싶어 시화전에 시를 출품했는데 입상하지 못했고, 그 후 동경의 대상이었던 선생님이 그녀를 불러 말한다.
“시화전 떨어져서 속상했니? 선생님이 열심히 밀었는데 안타깝게 됐다. 그래도 난 니 시가 좋다. 앞으로 기대할게.” 그다음에 나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난데없이 눈물을 쏟았다.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선생님의 기대한다 한마디 덕분에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나.”
에피소드의 제목은 ‘나를 기대해준 사람’.
제목에 눈이 가고, 처음 펼친 에피소드를 읽다 갑자기 눈물을 쏟은 이유는 나에겐 이런 기대를 해준 어른이 없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성장기 내 주변의 어른은 모두 무섭고 불친절했다. 밖에서는 ‘참 사람 좋은 ○○○’으로 불린 아버지는 집에서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런 남편 옆에서 본인 삶을 살아내기도 힘들었을 엄마는 자식들 의식주 건사만으로도 고단했을 것이다. 모든 잣대를 사회의 쓸모로 나누었던 아버지 눈에 공부 머리가 없고, 내세울만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딸은 들인 돈 값을 못하는 존재였다. 난 쓸모없는 정물 같았다.
아버지가 외부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한 미성숙한 어른이었다는 걸 이젠 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어린 자아는 여전히 그에게 인정받고 싶나 보다. 난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나 여기 있다고. 내 존재를 드러내 보이고 싶나 보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모든 노동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비난으로 자식이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알아서 성장하길 바랬던 아버지 또한 칭찬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부족한 면만 지적하는 가족에게 익숙해지지 않았고 냉소적인 인간으로 성장했다.
칭찬은 연습이 필요하다. 칭찬을 받는 연습도 필요하다. 어른을 칭찬하는 데는 세심한 관찰이 있어야 한다. 사려 깊은 마음으로 칭찬의 말을 골랐을 누군가에게 나를 낮추어 상대를 높이는 처세술 따위는 집어치우고, 나 기분 좋다고, 그런 칭찬의 말을 하는 당신의 안목은 과연 높다고 세련되게 받아들이고 싶다. “내가 하려는 이 말이 나 자신에게도 이롭고, 듣는 쪽에도 이롭고, 이 말을 전해 들은 제삼자에게도 이로운 말인가를” 생각하라는 법정스님의 말에 밑줄을 좍 그은 마음을 늘 새기면서 칭찬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근육을 키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