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고양이 Mar 15. 2022

내일부터 외국생활 쉽니다

타지에서 홀로 아등바등하고 일하고 연애하고 경험하다가 나가떨어진 이야기


코로나, 퇴사의 가장 큰 이유 



2020년 3월,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독일에 상륙했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독일에서 아시아인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길거리에서 온갖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고, 심지어 공공연한 아시아인 폭행 소식도 들렸다. 중국발 코로나라는 소식에 아시아인(정확히는 중국인)에 대한 독일 내 혐오는 극에 달했고, 집 밖을 나와 마주치는 독일인들이 나를 은근히 피해서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면 한편으로는 중국에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취급을 받아야 하지 하는 답답한 마음이 앞섰다. 


하드 락다운(Hartes Lockdown)이 시작되고 사실상 독일인을 비롯한 모든 독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삶이 일시에 셧다운 되었다. 집 밖을 나오는 것은 산책과 장을 보는 것 이외에는 사실상 모든 것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는데, 한 번에 두 사람 이상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인의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것조차 금지하였으니 독일에 가족이 없는 외국인 신분이라면 이것만큼 서러운 일이 있을까. 


엎친데 덮친 격으로 회사에서의 상황도 숨 가쁘게 변하기 시작했다. 팀 프로젝트의 예산이 줄어들면서 대략 100명쯤 되던 팀원들은 반 아니 그 이상의 수가 줄어들었고, 강제로 프로젝트에서 쫓겨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축근무(Kurzarbeit)를 하게 되었다. 게다가 가장 먼 거리에서 출장을 오는 직원의 경우 배치되는 예산(숙박 및 교통비)이 가장 컸기 때문에 가장 먼저 프로젝트를 하차해야만 했다. 


코로나 시기에 회사에서 단축근무 통보를 받게 되면 사실상 일을 거의 안 하거나 하루에 1-2시간 정도를 일하면서 본인 월급의 최대 67%를 받는다. 하지만 이 또한 회사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대기업들은 보통 여기서 발생하는 월급 차이를 자체적인 보험 또는 펀드로 메꿔서 피해액을 최소화하였다. 


어쨌거나 나 역시 회사의 장구 간 출장러로서 하루아침에 일이 없어지고 하루 종일 시간이 생겼음에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 곳곳이 풍비박산 나는 소식과 함께 주식 롤러코스터를 지켜보던 때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살면서 시간이 많은 것과 독일에서 살면서 시간이 많은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한국이야 배달 시스템도 잘 되어있고 집 안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독일처럼 원래도 심심하고 재미없던 곳에서 락다운까지 겹치면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아마 사람들이 이때 가장 많이 넷플릭스를 가입하고 독일의 배달 시스템도 번개 같은 급성장을 했던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냥 시간이 많고 할 일이 없는 게 전부가 아니다. 독일에서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감정은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괴로움을 내게 가져왔다. 바로 사회 연결고리의 부재 및 소속성 결여였다. 독일 친구들이야 부모님과 함께 지내거나 또는 부모님이 적어도 독일 내에 계셨기 때문에 집을 방문한다는 목적으로 이동이 가능했지만 어떤 뚜렷한 목적 없이 개인적인 여행 및 관광 또는 친구 방문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내게는 어딘가로 마음 편히 이동을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독일에 살던 내내 크게 와닿지 못했던 곁에 있는 가족의 소중함이 내게 가장 크게 느껴졌던 순간이었기도 했다. 타지에서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기분이 여태 이렇게까지 외롭고 고독하게 내게 다가왔던 적이 있었을까.  


그나마 나는 그때 완전히 혼자 살고 있지는 않았고, 거주 공간도 매우 컸으며 룸메이트도 있었다. 하지만 내 룸메이트였던 독일 여자는 회사를 운영했기에 거의 매일 새벽까지 잔업을 하였고, 나와 마주칠 일은 무려 일주일에 한 번도 채 안됬던 것 같다.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들조차 모두 문을 닫았기에 집 근처 공원을 걷거나 줄넘기를 하며 거의 매일 친구들과 몇 시간이고 아주 오랫동안 전화통화를 했다. 세계 각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몇몇 한국인 친구들이 있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었다. 독일에서 처한 내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하고 든든한 내 지원군이었으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단축근무 자체는 길지 않았고, 한 달 뒤 나는 다음 프로젝트를 배정받고 근무하게 되었지만 이미 락다운과 함께 싱숭생숭해진 내 마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다시 떠오르는 독일 삶에 대한 답답함, 난생처음 느끼는 코로나가 주는 속박 감이 나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곳, 정확히는 독일 자체를 당장 떠나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고 어디 바다에라도 첨벙 뛰어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코로나 이후로 나는 더 좋은 홈오피스 환경을 위해 이사를 했지만 집에 갇혀있는 생활은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내 집은 내게 그냥 감옥 같았다. 이 시기에 내 우울감은 하늘을 찔렀고, 만나던 남자 친구에게도 이제 서로 연락하지 말자고 통보했다. 나는 혼자서 땅굴을 파고 그 안으로 자꾸만 깊숙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내가 독일에서의 삶이 유난히 매우 힘들다고 느꼈던 부분 중에, 독일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점도 있었다. 내 회사 동료들은 하나같이 독일에서의 내 삶이 한국에서의 삶보다 더 낫기 때문에 내가 독일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독일이 더 돈도 잘 벌고 삶도 낫지 않아?라는 말을 들을 때면 너무 기가 차기도 했다. 


[[ 그래. 세전으로만 보면 독일이 더 많이 버는 것도 맞고, 개인 휴가 일수로만 따지만 독일이 일을 덜 하는 것도 맞아. 하지만 세후 금액으로 따지면 엔지니어 또는 백엔드 개발자의 월급은 비슷한 규모의 대기업으로 비교하자면 한국이 훨씬 더 벌고 전체적인 공휴일 및 개인 휴가 + 연차까지 비교했을 때 한국 삶의 질이 독일보다 반드시 떨어진다고 보기도 힘들어. 게다가 미혼이라면 다이내믹한 한국에서의 삶과 지루한 독일에서의 삶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수라고. 그리고 나는 너희들처럼 가까이에서 나를 지지해 줄 내 가족도 여기 없는데! ]] 


나는 어쩌면 심신이 너무 예민해져 있고,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을 심하게 느꼈기에 그때 마주했던 대부분의 것들을 그토록 부정적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한국 겨울이 춥다던 내 말에 독일인 집주인 아저씨의 질문 '그렇게 추우면 한국에 난방은 잘 돼있니?'에 결국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 말은 단순히 한국의 난방은 어떤 시스템인지가 아닌 (이전에 세입자가 중국인이라서 중국 얘기를 종종 하시던 집주인 아저씨가 중국은 난방이 꽤 열악한데, 같은 아시아로서) 한국에는 난방이란 거 자체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21세기에도 대부분 여전히 라디에이터로 공기를 덥히는 구식 난방을 하는 독일인들이 바닥을 데우는 보일러 난방을 하는 한국인에게 난방이 잘 돼있냐고 묻는 꼴이란. 게다가 21세기에도 독일인들에게 일부 MZ세대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한국이란 나라는 듣보잡이니까. 


너 정도면 독일에서는 괜찮은 삶이라며 그만하면 잘 살고 있는데 왜 불만이냐던 주변의 목소리들은 내게 언젠가부터 의미 없는 잡음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 홀로 외계인들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사회적 이질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았다. 


퇴사라는 카드는 어느 날 뜬금없이 내 품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퇴사를 결심한 그날로부터 약 1년이 걸렸다, 진짜로 퇴사하겠다는 내 의지를 상사에게 드러내기까지. 하루하루 나를 갉아먹던 내외부에서 찔러대던 고통들은 어느 순간 무뎌지기 시작했고, 나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의 직업 그리고 성인이 되고 가장 오랫동안 나의 삶의 터전이던 독일을 잠시 떠나 있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나는 결국 퇴사했고, 독일을 떠났다.  



작가의 이전글 독일, 눈 오는 날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