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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여름밤 아카시아 Mar 03. 2022

이 지구를 여행하는 법

나와 당신이 공명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일

고등학교 시절 엄마와 여동생과 밤에 드라이브를 했다. 뒷좌석에서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바람을 얼굴에 맞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는 여동생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며 어떤 음악을 듣는지 지금까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아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옆좌석에 앉은 여동생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귀에 꽃은 이어폰 하나를 뺏다. 

'나도 음악 들을래...' 하는 말에 동생은 흔쾌히 한쪽 이어폰을 내주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자 도대체 이것은 뭐지? 이 강렬하고 경쾌한 기타 사운드는? 분명 어디선가 그런 류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듯한 '살아있는 노래'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일본 가수 엑스재팬의 멤버였던 히데의 솔로 음악이었다.



음악이든 사물이든 내 앞의 사람이든 그것으로 인해 나의 존재의 반경이 더 넓어지거나 공명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엔 기이하게 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느낌이 평상시와  달라진다.

그것은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열려있어서  대기의 바람 하나,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하나 흡수하지 않은 것 없이 내가 넓어지고 더 커지는 느낌이다. 내가 하나의 나무라면 그 나무에게 향기로운 봄이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우주가 내게 새로운 심장을 이식하는 순간은 풍경의 체온이 달라지고 심장 박수가 빨라지는 흥미로운 전개 속에서 드러난다. 나는 그런 체험을 할 때마다 미래에 대해서  달콤한 기대를 걸게 되는 낭만에 빠진다. 내가 있는 이 세계가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세계였구나!라고 하면서 현재의 짜릿함과 미래에 대한 경이를 전에 없던 하나의 새로운 발견을 통해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내 몸안의 모든 세포가 오로지 현재의 나의 "있음"으로 인해 주시해 있는 그 순간은 뜻하지 않은 이러한 굉장한 것들과의 발열된 순간에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히데의 음악들을 들으며 기타리스트의 꿈을 꾸었다.

음악이란 건 모두가 좋아하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밴드 음악을 진지하게 듣기 전까지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누구보다 음악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다. 



모두가 평범해 보여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각자 어떻게든 다르게 강하고 다르게 약한 면이 있으며 우리는 평범한 순간에도 강렬하게 반짝이는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내보일 때가 있다. 나는 반짝거리는 사람들을 동경했고 그 사람들처럼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흉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곧 불안해졌다. 불안하다는 것은 정서적인 의존이 나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느라 정작 나의 삶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으므로 필연적으로 감정의 빨간 신호등이 깜빡였을 것이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쌓여있던 감정들을 표출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장기자랑이나 반 대회가 있을 때면 아이들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췄다. 음악을 들으면서 욕망이 생겨나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것을 갈망하다가 선뜻 해냈을 때에는 나를 향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런 모습은 고등학교 때로 이어졌고 그럴 때면 평소의 평온해 보이고 조용한 모습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 모습에 유쾌해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때는 그저 나도 모르게  심취해 있던 것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나를 향한 친구들의 뜨거운 박수와 환호소리가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처음 드는 그 느낌은 나의 세계가 갑자기 커질 때  벅차 오는 증상들로 나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나의 내면을 거쳐 펼쳤던 순간들이 평범한 나를 반짝거리게 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그런 찰나의 순간들에 공명하고 나 자신의 삶 어딘가에도 있었을 그 반짝거림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겨놓는 태생적인 자질이 있다. 우리가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되는 신의 선물이랄까... 우리는 한 번쯤 누군가에게  커다란 세계였던 적이 있어왔다.


  

요즈음 드는 생각은 그 반짝거림과 미래의 대한 싱싱한 기대감을 다시 가져보는 것에 있다. 

내 기억 속에서 그것들은 단지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는 청춘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한 청춘은 그런 시각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이제 막 싱그러운 봄이 든 나무의 모든 시간은 성장에 있다. 언젠가 그것을 그리워할 정도로 현재를 첫 느낌처럼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군가와 혹은 눈앞의 시간들과 더 자주 공명하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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