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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여름밤 아카시아 Feb 28. 2022

장소에 대한 시선

마음속에 각인된 장소라는 시 

치유스팟이 있다. 어떤 장소에 이르면 마음이 저절로 치유가 되거나 편안해지는 좋은 기운을 갖고 있는 장소. 장소란 개인의 성향과 연관되어 있겠지만 생각의 정리가 필요할 땐 나만의 치유스팟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나이에 따라 치유스팟은 달라지고 나의 취향이나 관념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에는 나의 치유스팟이 장미정원이었다. 학교 뒷마당은 급식실로 이어지는 길이였다. 그 길 사이사이에 참새들이 좋아하는 덩굴과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친구들과 간식을 먹으며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모든 정해진 시간과 시간의 틈을 그 장소 속에서 보냈다. 

그저 그 장소가 좋았다. 누군가의 시선에도 자유로운 어떤 경계 없는 무용한 땅 위에서 수험생이라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가슴 시리게 환한 장미 넝쿨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치유스팟은 카페일 수도 수목원이기도, 혹은 도서관이기도 할 것이다. 

이상하게 기운이 없는 날이면 나는 기운을 얻기 위해 머릿속의 치유스팟을 돌린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나는 첫 번째 치유스팟인 성이시돌센터로 간다.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조금 올라가면 묵기도의 호수가 나온다. 호수의 아름다움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다면 

날씨가 좋은 날이어야 하고 오전이어야 한다. 

날씨가 좋으면 호수 위의 빛이 산란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 있고 

오전이라면 호수 주위를 도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치유스팟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나는 큰 바다보다는 호수를 좋아하는 성향이다.

호수에는 잔잔함이 있다. 그 위에서 자유롭게 빛이 뛰어노는 것을 보면  마음이 더없이 평화로웠다. 호수 주위에는 키 큰 나무들이 둘러져 있고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물 위의 빛이 흐르듯이 나를  따라오는 광경을 좋아한다.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다보고 있으면 햇빛에 저절로 눈이 감기고 내면의 명상이 시작된다. 주위는 새소리가 은은하게 들리고 운이 좋으면 호수 위에 고개를 내민 거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호수 주위를 돌다 앉아있다 되돌아온다. 그 행동이 나에게는 휴식이 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충전이 된다. 그 장소에 이를 때마다 머리가 맑아지거나 생각이 정리되고 나라는 이 작은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고민이나 문제들이 먼 거리에서 재 투영이 될 때쯤 나는 따뜻한 햇빛을 듬뿍 쐬고 상처를 치유받은 채 현실로 돌아온다. 



사람이 고향이라는 장소에 다다르면 이런 회복의 느낌이 다시 생기곤 하는 걸까, 나에게 고향은 삶의 리듬감을 찾아주는 나의 마음과 가까운 곳이었다.



호수를 나와 성 이시도르 카페에 들어가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된다. 엔틱 인테리어가 과거로 돌아온듯한  착각을 자아내며 마음이 조금 묘해진다. 성가 음악 같은 바이올린 선율의 웅장함에 갑자기 가슴이 뛰며, 자연스럽게 카페 창문 너머로 넓게 펼쳐진 목장에 시선을 빼앗긴다. 바이올린 선율이 나와 공간 사이를 점점 넓혀나가고 있을 때 내가 시킨 커피를 음미한다. 진한 라떼인 코르타도 커피와 부드러운 당근 케이크의 조화가 절묘하다. 음악은 잠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나와 함께 떠돌다 사라진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아졌다고 생각한다. 



나의 비밀스러운 시간은 오로지 내가 찾은 공간으로 가득 채워 넣어야만 하는 것이 룰이다. 아무도 방해받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하는 하루여야 한다. 과거로 돌아간 듯한 음악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처럼 일어선다. 다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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