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곽에 탄생한 모더니즘의 선언
근현대 건축 역사상 가장 아이코닉한 건물을 꼽으라면 단연 빌라 사보아(Villa Savoye)가 아닐까. 모더니즘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반박의 여지없는 대표작 빌라 사보아는 파리에서 40분 거리의 근교 푸와씨(Poissy)에 위치해 있다.
빌라 사보아를 제외하면 근처에 특별할 게 별로 없는 탓에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찾아가는 게 망설여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건축에 대한 관심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곳을 방문하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과 유산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빌라 사보아를 인류 최초의 건축이라 볼 수 있는 움막에 빗댄 이유다.
여행을 계속할수록 유럽 건물 특유의 장식적인 외관에 슬슬 싫증을 느꼈다면 빌라 사보아를 방문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다. 어쩌면 르 코르뷔지에도 같은 감상을 느꼈을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당시 고전적인 양식을 답습하는 것만 반복하던 건축 시류와 장식예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건축물은 주거를 위한 기능에 충실해야 하고, 또 자동차처럼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빌라 사보아에는 그런 그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왕복 두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차고 넘칠 만큼 빌라 사보아가 주는 공간 경험은 너무도 특별하다. 다양한 수목들로 둘러싸여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빌라 사보아 영역의 초입에 들어서면 잠시 동안 다른 시공간으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진입로를 따라 몇 걸음 옮기면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듯 초연히 서있는 빌라 사보아를 마주하게 된다.
차량의 출입을 고려해 르 코르뷔지에가 직접 계획한 정원 길을 따라 '건축적 산책'을 시작해보자. 외부에서 보았을 때 빌라 사보아의 가장 큰 특징은 '파사드(Façade)'이다. 보통 주출입구가 위치한 건물의 정면을 의미하는 파사드는 건물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읽히는 건물의 얼굴이다.
빌라 사보아의 파사드는 붕 떠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필로티 공법으로 파사드를 들어 올려 주출입구가 내포하는 건물의 정면성으로부터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했던 '건축의 5원칙'을 그 자체로 완수시킨다.
르 코르뷔지에는 필로티 공법을 적극 활용하여 자유로운 파사드 구성이 가능하게 했다. 또 건물을 둘러싼 정원을 그 빈 공간에 끌어들였다. 이런 식의 매스 변형을 통해 공간을 확장하고 서로 간섭시키는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건축 디자인에서 활용되는 원칙이다.
얇은 철근콘크리트 기둥과 슬라브가 하중을 분산시키고 부담하도록 한 이 구조는 뿐만 아니라 현대건축을 내력벽, 즉 하중을 견뎌내는 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말은 곧, 벽이 더 이상 구조체로써 필요한 장소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공간을 구획하는 디자인 요소로써 사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건축적 산책은 빌라 사보아 내부로 들어가서, 건물 1층부터 옥상 정원까지 이어지는 경사로(ramp)에서 계속된다. 이 경사로는 2층 테라스를 비추는 창과 맞닿아있는데, 경사로의 램프에 의해 자연스럽게 재단된 창은 내부의 채광을 완벽하게 조절한다. 이를 통해 경사로를 따라 걸으며 채광에 의한 명암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고, 또 이러한 명암의 변화는 르 코르뷔지에가 고집한 흰색 벽에 의해 가장 효과적이고 극대화되어 드러난다.
2층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또 다른 건축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전체를 둘러싸는 리본 창은 마치 긴 끈처럼 수평으로 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리본 창은 건물 주변의 정원과 수목을 조망하며 파노라마적 뷰를 선사한다.
또 하나의 공간은 바로 테라스이다. 이 테라스는 빌라의 주인인 사보아 가족이 식사 및 거실 공간으로 사용한 살롱과 경사로, 반대쪽 침실에 딸린 작업실 등의 공간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 커다란 테라스 덕분에 빌라는 2층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1층 곳곳에 자연광을 제공할 수 있다.
특유의 리본 창은 테라스 외벽으로도 이어진다. 벽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쪽에 서서 경사로를 바라보면, 경사로와 나선 계단, 이 주택의 주요 수직 동선 두 개가 입면 요소로써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동선을 입면에 반영시키는 것 역시 오늘날 현대 건축에서 자주 사용되는 디자인 방식이다. 이렇게 빌라 사보아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에서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들은 발견된다.
2층에 배치된 부엌, 손님방, 자녀방, 부부의 침실 등을 천천히 둘러보자. 시선이 닿는 모든 부분이 감각을 자극하고 통렬히 흔들어댄다. 곳곳에 활용된 붙박이 벽장은 자유로운 벽 구성을 통한 주거 기계로서의 집을 완성시키는 요소 중 하나다. 흰색 벽을 기본으로, 곳곳에 적절하게 채택된 색채 또한 감상에 즐거움을 더해준다.
외부로 노출되는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마지막으로 옥상의 일광 공간에 도착한다. 이곳은 1920, 30년대 증기 크루즈의 유선형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스트림라인 모던(Streamline Moderne) 스타일의 모티프들이 눈에 띈다. 계단실 외벽과 주출입구 쪽 파사드를 형성하는 곡선형 가벽 등이 그중 하나다.
주거공간으로서의 건축의 기능성을 강조한 르 코르뷔지에의 철학은 오늘날 현대인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후 복구 시기 빠르게, 많은 주거시설을 공급하기 위한 도시 정책을 추진하던 당시 모습과 인식이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 이 역시 모더니즘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때문에 빌라 사보아에 담긴 모더니즘의 정수와 현대건축에의 영향을 둘러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울 것이라고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