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모든 게
네가 성장하는 과정일 거야. 힘내.”
“성장… 난 이딴 감정을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차가운 그 말에 당황한 채 굳어지는 희도의 표정.
‘더 이상 나의 응원이 닿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끝내 눈물이 흘렀다.
그 말을 내뱉기까지의 따뜻한 진심을
마음 깊숙한 곳에선 모르지 않을 거면서도
눈앞의 상황이 너무 힘들고 힘들어서
응원받을 마음의 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은 백이진.
그래서 그 응원마저 모질게 내쳐버린 백이진.
겨우 25살인 그 애는
시대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던
그 아픔을 깊이 가지고 있었다.
다시는 행복하지 않겠다 다짐도 했던 그는
힘든 상황에선 사랑하는 이에게도
한없이 부정적이고 냉소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유림에 대한 단독보도가 나갔던 날
희도에게 모진 말을 뱉어냈던 것처럼.
두 사람의 이별이 911 테러 때문인게 말이 안된다고?
현직 기자들도 백이진만큼은 아니라고?
그래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아니, 그건 철저하게 각자의 눈으로 바라본 거다.
백이진을 이해하려 한 게 아니라
드라마가, 주인공들이 너무 좋고 애틋해서
‘나 같으면 나희도 포기안해!’ 라는
감정적인 아쉬움 끝에 정해버린 결론이다.
-
이별한 백이진.
자신을 어둠으로 내몰았던 세상을
다시 한 번 위해 보겠다고 기자가 되었지만
뛰어난 기자가 된다는 건
아끼던 동생을 비난의 손가락 한가운데로 밀어넣은 뒤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일이었고
부서를 옮겨 발로 뛰어도 봤지만 그럼에도
사회에 드리우는 어둠은
자신이 막기에는 너무 크고 어둡다는 걸
깨달아버린 백이진이었다.
그가 그러고도 무너지지 않을 방도는 없었다.
백이진이 일에 미쳤던 건
삶에 대한, 인생에 대한
일종의 간절함이었다고 느꼈다.
사랑, 연애 그 모든 것 이전에
인간 백이진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점점 오래 기다려야 겨우 가능해진
전화 한 통.
그 수화기 너머에는 나희도가 있었다.
그가 누구보다 힘든 걸 알고 그게 한없이 안쓰러우면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반복에
사랑이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하는
정답 없는 고민에 빠지는 나희도.
희도는 예전에 술에 취한 채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너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이끄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마. 힘내.”
그리고 백이진은 이렇게 답했다.
“사랑해. 모든 방식으로.”
백이진에게 안겨 눈을 맞추고 함께하며 건넸던 응원.
마음은 여전히 같았으나 그뿐이었다.
둘 사이에는 점점 어떤 벽이 높아지고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들 하지만
둘은 그게 아니란 건 온몸으로 증명했다.
다만 상황이라는 건
야속하게도, 부인할 수 없게도 달라졌다.
해결할 틈도 없이 또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이제는 공허한 시간이 흐를 뿐이라는 걸,
아무리 노력해도, 설사 상황이 달라져도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느끼는 나희도.
그렇게 둘은 이별했다.
-
해피엔딩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극적으로 두 주인공이 함께 있게 되거나
어떤 방법을 찾았다면,
그렇게 드라마가 끝나버렸다면
시청자들은 행복했을까?
울음은 덜했겠지만
나는 오히려 조금 이질감이 느껴졌을 것 같다.
나희도와 백이진의 사랑은
성애적인 것 이상이었기에 너무나도 깊었고
그럼에도, 그 깊은 사랑에도 예외는 없었다.
서로에게 너무 소중한 존재였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지만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라는 말이
둘의 이별을 너무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좌절, 슬픔, 무력함이 희도에게까지 뻗칠까
참고 참으며 혼자 곪아갔던 백이진.
그가 그런 감정도 모두 공유해주길 바랐던,
백이진은 자신과 다른데, 그런 사람이 아닌데
무심결에 그가 바뀌길 바랐던 나희도.
사랑한다는 감정에만 속아 관계를 이어나갔대도
그 일을 없었던 척 덮을 수는 없었을 거다.
달라보이지만 결국 비슷한 이유로
둘은 다시 지쳐갔을 거다.
모든 방식으로 나희도를 사랑한다던 백이진,
그리고 같은 마음이었을 나희도.
둘이 선택한 방식은 이별이었다.
서로에게 너무 큰 의미였기에
그 이별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어서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을 뱉어놓고
서로를 미친듯이 찾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만나서는
가방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운동화 끈 잘 묶고 다니라고,
다치지 말고 시합 잘 하라고.
잘 지내라고.
이제는 전할 수 없을 진심을
한없이 애틋하고 슬픈 눈으로 전해야했던
나희도와 백이진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서로를 안고 펑펑 울면서도
없던 일로 하자는, 다시 같이 해보자는 말은 없었다.
더 이상은 사랑의 감정만 가지고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방식은
다름 아닌 이별이기에.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소중했던 건
그 감정들 마저 너무 솔직하고 사소하게,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으로 잘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예쁘게 만들기 위한 드라마가 아니었다.
스토리의 모든 부분에 진심이 담겨서
그 마음을 다 전달하려면 그림이 예뻐야했다.
두 메인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캐릭터가 그랬다.
그렇게 그들의 드라마에 스며들었다.
나희도의 무모함과 솔직함이 부러웠고
백이진의 따뜻함이, 참 따뜻했다.
문지웅의 사랑은 귀엽고 멋졌다.
그와 정반대인듯 너무 닮은 친구 지승완의 똑부러짐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신재경의 독함이 얼마나 값진지 느낄 수 있었고
고유림의 여린 마음 위 강인함이 애틋했다.
이들의 마음이 하나같이 푸르르고 예뻤다.
모든 것이 적절히 조화되어 탄생한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너무 소중한 작품으로 마음에 남았다.
16편 끝에 내게 이 드라마는
마음과 머리가 피폐해질 때면
한번씩 꺼내보고 싶은 이야기들로 남은 것 같다.
예전에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동아리 공연 때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 노래가 보컬 선배랑 잘 어울려서
선곡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약 4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가사를 듣는다.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계절엔
아직도 너의 손을 잡은 듯 그런 듯 해.
그때는 아직 꽃이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그 날의 바다는 퍽 다정했었지.
아직도 나의 손에 잡힐 듯 그런 듯 해.
부서지는 햇살 속에 너와 내가 있어
가슴 시리도록 행복한 꿈을 꾸었지.
우 그날의 노래가 바람에 실려 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지난날의 너와 나.
너의 목소리도 너의 눈동자도
애틋하던 너의 체온마저도
기억해내면 할수록 멀어져 가는데
흩어지는 널 붙잡을 수 없어.
우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우 그날의 노래가 바람에 실려 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지난날의 너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