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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May 17. 2024

부처님 오신 날 뜬금없이

반려동물에 대하여

  2015년. 3학년 담임을 할 때 항상 명랑하던 우리 반 정은이가 하루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교무실에 찾아왔다. 조퇴를 해야겠다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울먹거렸다. 평소 조퇴를 거의 하지 않던 학생이었기에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유는 묻지 않고 나는 조퇴증을 발급해 주었다. 나중에 정은이와 가장 친한 친구가 내게 말해주었다.

 “오늘 아침에 정은이가 키우던 토끼가 하늘나라로 가버렸대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난 한 번도 동물을 길러본 적이 없었다. 인스타 팔로우를 맺은 친구들이 자기 게시물에 올린 반려동물 이야기 또는 달리기를 하며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경험 등이 반려동물에 대한 내 기억의 전부였다. 미안하게도 난 정은이가 슬퍼하고 있음은 알았지만 정은이의 슬픔을 진심으로 공감하지는 못하였다.

 정은이의 일 이후로 며칠 동안 동물을 키운다는 의미와 반려 동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중학교 3학년 때 신해철 형님이 넥스트 2집 타이틀곡으로 부른 ‘날라리 병아리’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육교 위의 네모난 상자 속에서

  처음 나와 만난 노란 병아리 얄리는

  처음처럼 다시 조그만 상자 속으로 들어가

  우리 집 앞뜰에 묻혔다.

  나는 어린 내 눈에 처음 죽음을 보았던

  1974년의 봄을 아직 기억한다.”

 

 신해철 형님 특유의 중저음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시작부터 다분히 철학적이다. 너무 아름다운 멜로디 덕분에 노래가 나올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굿 바이. 얄리.” 이러면서 클라이맥스 부분을 흥얼거리고 그냥 지나쳤을 수 도 있지만, 가사를 음미해 보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눈물이 마를 무렵 희미하게 알 수 있었지

  나 역시 세상에 머무르는 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젠가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뇌 과학자 정재승 박사와 유시민 작가가 ‘삶의 유한성’을 주제로 진지하고도 재미있는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있기에 현재의 삶은 유의미하다는 것이 유시민 작가의 의견이었다. 한편, 정재승 박사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죽음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므로 삶의 패러다임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을 주장하였다. 두 의견은 괘를 달리 하면서도 죽음의 의미로 인해 삶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머무르는 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인지한다면 어찌 오늘을 허투루 살 수 있을까?

TV에서 본 가장 고차원적 토론

 ‘날아라 병아리’ 노래를 통해서 신해철 형님이 전하려던 메시지도 비슷한 맥락으로 와닿는다.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오늘을 의미 있게 살기. 그런데 신해철 형님이 지은 다른 명곡들을 고려하며 ‘날아라 병아리’를 거듭 듣다 보니 오늘따라 석가모니 가르침의 바탕이 되는 ‘네 가지 진리’가 들려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1.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2. 고통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고통스럽다.

  3. 고통의 원인을 알면 없앨 수 있다.

  4.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일정한 생활 규범을 받아들여야 한다.

 

 석가모니가 살아생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사성제(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사례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일반적 조건에 대한 명제이다. 신해철 형님은 ‘날라리 병아리’를 통해 이를 대중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첫째, “우리 함께한 날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지”라 하며 얄리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에 대해 무방비 상태임을 일깨웠다. 두 번째, “눈물이 마를 무렵 희미하게 알 수 있었지”라 하며 희미하게나마 깨닫지 못하면 상실의 고통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음을 말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 “나 역시 세상에 머무르는 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말하며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生者必滅)는 진리를 받아들이면 괴로움이 해소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 얄리의 행복을 빌어주며 바르게 사는 삶의 지향점을 제시했다.


 사실 석가의 가르침을 이와 관계없어 보이는 부분에서부터 유추하는 글은 내가 처음 쓴 것은 아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도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마르크스 사상과 프로이트 치유방법이 석가의 사성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논증하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비단 그것뿐이겠는가? 진리는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표현은 달라도 부처의 가르침과 비슷한 결의 사유를 했던 철학자들은 숱하게 많을 것이다.

 철학을 전공한 신해철 형님이 처음부터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날아라 병아리’ 가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작사한 다양한 노래 가사를 통해 그는 새로운 앎을 깨우는 화두를 던졌다. 그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의 노래를 듣는 소년은 어른이 되고, 그의 노래를 듣는 어른은 소년이 된다. 보고싶어요. 해철이 형.

 2015년 우리 반의 정은이는 사성제가 무엇인지는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토끼와 이별의 아픔을 겪는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며 내면의 성장을 경험했을 것이고 행복하게 사는 삶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졸업 후 몇 년 뒤 스승의 날에 찾아온 정은이는 나보다 더 어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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