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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Jun 18. 2024

기어이 여자를 이겨야 시원한 남자

무언가에 대해 초보자라고 느낀 경험

그녀와 크게 싸우고 사흘이 지나서야 그녀로부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너 진짜... 남들은 연애 어떻게 하는지 좀 배우고 와라.”     


 학창 시절과 대학생 때 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성에게 매력을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고, 어쩌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생겨도 어설프게 고백하는 바람에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서른 살이 다 되어서야 난 인생의 첫 연애를 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임용고시를 두 번 연속으로 낙방하고 어렵게나마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어 2007년 3월에 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사로서의 커리어도 쌓으면서 자투리 시간에 임용고시에 재도전하기 위한 공부도 하리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출근 한 달도 못되어 뜻밖의 변수가 발생하였다. 교무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어느 여자 국어 선생님에 대한 사랑의 씨앗이 내 마음에서 싹을 틔워버린 것이다. 그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며 점점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든, 집에서 혼자 있을 때든 항상 그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결국 난 그녀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고 어설픈 내 고백을 그녀가 귀엽게 받아준 덕분에 꽃 같은 그녀와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다. 공공장소에서도 난 그녀에게 “이쁜 것이 죄라면 넌 최소 무기징역 감.”과 같은 멘트를 서슴지 않고 던지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저 좋았다. 사내커플인 것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학교 안에서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학교 복도에서 우리가 마주칠 때 눈빛 교환하는 모습이나 학교 근처 맛 집에서 데이트하는 모습 등이 포착되면서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우리 사이를 눈치채기 시작하였다. “사내 연애는 복사기도 눈치챌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린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게 더 깊이 빠져들었다. 우리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생각하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로가 서로에게 거는 기대가 비현실적임을 자각하기 시작하였고, 다툼도 잦아졌다.

 한 번은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 교사와 내가 교무실에서 웃으며 환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그녀가 목격한 적이 있었다. 별 일 없이 넘어 가리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퇴근 이후 학교 밖에서 만난 그녀는 단단히 토라져 있었다.

 “어쩜 그럴 수가 있어? 나랑 싸웠던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다정히 말하는 건데?”

 연애도 처음이었지만 이런 소재로 꾸중을 당하는 상황은 너무나 예상 밖의 것이었기에 난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자기랑 그 사람이랑 다툰 것과 내가 그 사람이랑 말하는 거랑 뭔 상관인 건데?”

 당돌하게 대드는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헐. 잘 있어!”

 앙칼진 말을 내게 쏘아붙인 그녀는 그다음 날 학교에서도 날 못 본 체 하였다. 전화도 씹으면서 퇴근 후 그녀 집 앞에 찾아갔던 날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그녀가 문자로 내게 보낸 내용이 바로 “어디 가서 연애 좀 배워 오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문자를 받자마자 난 그녀 집 앞으로 찾아가 그녀 앞에서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용서를 빌었다. 우리 만남은 그 뒤로 3년간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나 사이의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 일어났다. 그녀는 처음 싸울 때 내게 가졌던 불만이었던 내 서툰 연애방식을 계속 문제 삼았다. 그녀는 A라는 말을 뱉으며 나로부터 B라는 말을 듣길 원했지만 난 C라는 멘트를 던지며 그녀를 아연실색하게 하는 순간이 잦았다. 무엇보다 난 여자의 말을 듣고 이에 공감하여 맞장구쳐 주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그녀와 싸우다가 냉각기가 찾아오더라도 화해의 제스처는 나보다 두 살 많았던 그녀가 항상 먼저 하였다. 나중에서야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 내 여자를 이기려 하는 것이다.’ 임을 깨달았지만 그땐 그걸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화를 내며 그녀의 잘잘못을 따지는 행위는 사실, 나의 낮은 자존감을 드러내는 비루함의 발로임을 몰랐다.

 자기가 원하고 기대하는 만큼 상대가 내게 대해 주길 원했던 것은 우리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난 그녀에 비해 상대가 내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나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이 너무 미숙했다.      


 눈부셨던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 많은 소개팅을 하였다. 20대에 하지 못했던 연애도 원 없이 했다. 하지만 좋게 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0년 전, 어느 초등학교 여선생과는 거의 결혼 직전까지도 갔었다. 그런데 그 여선생이 별안간 1주일 이상을 연락 없이 잠적하였다. 그녀 직장과 집 앞을 찾아갔지만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실의에 빠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혼자 제주도로 여행 간 둘째 날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빠.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나에게 어쩌면 그렇게 질 낮은 스테이크를 사 줄 수 있는 거예요?”

 그녀가 잠적하기 직전, 그녀와 함께 갔던 스테이크 집이 문제였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스테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풀린다던 그녀에게 사 줬던 스테이크였는데 다소 실망스러운 수준의 고기가 나온 것이다. 그래도 그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던 난 되물었다.

 “그렇다고 1주일 이상이나 잠수를 타나요?”

 “네. 저에게는 스테이크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일전에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아.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제주도에서 아픈 마음이 치유되었던 난 부드럽게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리라는 생각으로 제주도에서 봤던 좋았던 것들을 그녀에게 말하였다. 한참을 듣던 그녀는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오빠. 제주도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글쎄요. 처음으로 온 곳이니 최소 모레까지는 있을 것 같아요.”

 그 뒤로 그 초등학교 여자 선생과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난 그때 그냥 “내일 바로 갈게요.”라고 말하면서 그다음 날 부산행 비행기를 타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면 그렇게 그녀와 영영 헤어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내 눈치가 모자랐다. 마지막 전화를 나누며 이별을 확정할 때 그녀는 2007년의 그녀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내게 남겼다.

 “오빠는 정말 그렇게 여자를 이기고 싶은 건가요?”     


 간혹 술자리에서 이른바 ‘스테이크 녀’였던 그 초등학교 여선생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진즉에 그녀와 헤어지기를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하긴, 그녀와 더 오래 만났다면 그녀를 통래 내 모자람이 많이 나타났을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켜볼 용기가 부족했던 난 더 자주 아파했을지도 모르겠다.

 연애를 시작할 땐 땀 흘리며 운동한 직후에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킬 때만큼이나 많은 도파민이 나온다. 하지만 운동 이후 마시는 술의 양이 증가하면 점차 괴로운 순간이 오듯, 연애 역시 길어지다 보면 의도치 않은 고통이 찾아올 수 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이성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역량을 그리 많이 가지질 못하였다. 그래서 연애가 오래 지속될수록 상대에게는 실망감이, 나에겐 비참함의 순간이 찾아올 확률은 매우 높을 수밖에 없었다. 2007년의 그녀와 ‘스테이크 녀’를 비롯한 내 실패한 연애 상대자들. 알고 보면 그녀들은 내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해준 좋은 스승이었다.       


 독서활동과 나름의 인문학 공부를 통해 내면의 성장을 어느 정도 경험했다고 자부한 시점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을 했고 쌍둥이들을 만났다.


 ‘성장 좋아하시네.’     

 아내와 아이라는 스승을 통한 배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역시나 인간은 평생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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