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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시작

60이 넘어 시작된 방황


  어느덧 60대 중반이다. 수염이 온통 하얀 게 누가 봐도 상늙은이다. 아직은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운전 감각도 젊은 시절 못지않고, 생각의 깊이나 관용의 폭은 넓어져 맘 상하는 일이 많지 않고, 이리저리 선을 그어가며 경계 짓는 일을 줄이고 삶의 다양성을 한층 즐기고 있으나 겉모습은 누가 봐도 상늙은이다. 

  그런데 나는 상늙은이가 되도록 방황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왔다. 뭘 선택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거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한 기억은 특별히 없다. 그래서일까. 살아온 내력도 그리 내세울 것이 없다. 공부를 그리 못하지도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은 보통의 학생으로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짧은 기간 즐겁게 아이들을 가르쳤고(5년 7개월), 마음의 간절함을 따라 교직을 사임하고는 신학대학에 진학해 신학을 공부했고, 30대 초반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곧바로 교회를 개척해 작은 교회 목사로 목회하며 살아온 것이 내 인생의 전부다. 신학생 시절인 1987년에 시청 앞 광장에 나가 반독재 6월 민주 항쟁에 참여하기도 하고, 목사로 살면서 공정선거 운동 등 시민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교회 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겠다며 교회 개혁의 몸부림을 하긴 했으나 성취한 건 별로 없는 인생길을 걸어왔다.      

  누구나의 인생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어려움이 없진 않았다. 40대 후반에 만성 간염이 간경화로 악화하여 숟가락을 드는 것이 힘들 만큼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로 인해 나의 모든 것이었던 교회를 사임하고 목회를 내려놓는 아픔과 좌절을 겪었다. 그 후 6년 넘게 응급실을 드나들며 내일을 알 수 없는 투병 생활을 했고, 갖가지 노력에도 몸은 결국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무너져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이 자기 간을 이식하자며 서두르는 바람에 아들의 간을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으니(수술 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아들이 엄청나게 고생했음) 어려움 없이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갈 길을 몰라 방황하거나 엉뚱한 길에서 헤맸던 기억은 특별히 없다. 달리 말하면 내 자리에서 이탈하거나 대형 사고를 치거나 하는 일 없이 평균적인 보통의 길을 따라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모범적으로 흠 없이 살았다는 뜻은 아니니 절대 오해는 하지 마시길)      


  일찍이 교직을 내려놓고 신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내 길은 오직 하나였다. 목회자로 사는 것. 하여, 7년 동안의 신학 수업을 마치고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나는 조금의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교회를 개척해 목회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30여 년 동안 공부하고 설교하고 교우님들 돌아보며 살았다. 공부하고 설교하고 교우님들 돌아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거나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데다가, 쉼 없이 공부해도 공부해야 할 것이 쌓여있고 설교 준비를 하는 것만 해도 늘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목회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오직 목회와 책에 코를 박고 살았다. 목사로 목회하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다.  

    

  이처럼 목회 일념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방황이란 놈과 얼굴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방황이란 놈이 나를 영영 피해가진 않았다. 늦어도 한참 늦은 60대(방황을 많이 했던 사람이라도 방황을 멈출 만한 때)에 낯선 방황이 시작됐으니 말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몇 년째 인생 최초의 방황을 하고 있다. 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고, 평생 굳게 딛고 살아왔던 신앙적 토대와 체계가 일부는 깊어지고 일부는 해체되면서 새로운 혼돈을 겪고 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일이다. 60이 넘은 나이에, 젊어서도 해보지 않은 방황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60대 초반에 목회를 그만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의 정년은 70 세지만 70까지 목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의 현실도 그렇고, 내가 목회하는 교회의 현실도 그렇고, 평생 굳게 딛고 살아온 신앙적 토대와 체계도 그렇고, 모두가 그리 건강하거나 참되 보이지 않았기에. 너무 많은 것들이 왜곡돼 있고, 왜곡된 채로 편협하며, 문자에 갇혀 깊이를 상실했고, 깊이 없는 표층 종교로 추락한 교회의 모습이 누추할 뿐 아니라 혐오스럽기까지 했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현실에서 목회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목사의 삶을 그만 접고 싶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어왔고, 그 생각이 점차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인생에 방황이 시작된 것.    

  

  평생 목회 일념으로 살아온 만큼 목사의 삶을 접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게 참 많았다. 언젠가 아들이 말했다. 아빠는 목회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렇다. 나는 목회 외에는 별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목회 외에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관심 있는 것도 없는 사람이다.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면서도 더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 교회의 담을 넘어 자유롭게 삶의 다채로움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 올라왔다. 


  결국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결정했다. 교회를 사임하고 목회를 내려놓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교회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교우들은 난데없는 사임 표명에 놀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좀 더 기도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마음 약한 나는 결국 사임을 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목회를 이어가는 것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마음은 이전 같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교회가 나의 전부였고, 오롯이 목회 일념으로만 살았는데 더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자꾸 다른 생각, 다른 마음이 내 허락도 없이 들랑날랑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버젓이 목회하고 설교하며 이전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마음 한구석에서는 ‘목회를 그만두면 뭐 하며 살지?’, ‘앞으로 뭐 하며 살면 좋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등등의 상념들이 바람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내적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가하게 앉아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사진 한 장에 눈이 멈췄다. 긴 머리에 수염을 멋지게 기른 인물 사진이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주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순간 클릭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하도 멋진 사진이 많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호기심에 발목이 잡혀 바로 클릭을 했다. 보니, 시니어 모델 김칠두 씨 인터뷰 기사였다. 55년생 김칠두 씨가 순댓국집 사장을 하다가 패션모델로 화려한 변신을 한 이야기.(지금 확인해보니 2019년 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였음) 기사를 읽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 번도 꿈꾸지 않은 일이었고,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기사를 읽는 순간 묘하게도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나는 아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퇴근한 아내에게 기사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나도 패션모델, 시니어모델을 하면 어떨까?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슬쩍 물었더니 아내 또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에게 딱이야. 내가 보기에는 김칠두 씨보다 당신이 더 멋진데’라면서 한껏 띄워주었다. 

  내친김에 며칠 후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물었다. 이번에도 은근히 기대하면서. 두 사람 모두 대찬성이라고 격하게 반겼다. 해보시라고. 아빠 멋있다고.      


  가족의 응원과 지지에 힘이 났다. 용기가 났다. 하여,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 기사에 난 모델 아카데미에 문의 전화를 하고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그랬더니 날짜를 정해 상담하러 오란다. 그래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세계를 향해 무작정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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