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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지자 행보(1)

패션모델에 도전하여 


   낯선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마음으로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TSP 모델 아카데미로 갔다. 그것이 진짜 방황의 시작이라는 것도 모른 채. 갔더니 나 외에도 몇몇 사람이 더 있었다. 잠시 로비에 앉아 기다리면서 몇몇 드나드는 사람들을 봤는데 범상치가 않았다. 하나 같이 키가 큰 데다가 스타일이 남달랐다. 완전히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기가 팍 죽었다. 그래도 태연한 척하면서 아카데미 소개를 받고 사진 촬영을 했다. 난생처음 포토그래퍼가 요구하는 대로 소위 포즈라는 걸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굉장히 멋쩍었다. 또 안 해본 짓을 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워킹에 대한 기초 강의와 연습도 했다. 안내하는 대로 초급반 등록을 하고, 다음 주부터 정식 수업에 참여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2019년 2월 말이었다.      

  그때부터 4월 말까지 2개월 동안 매주 1회 모델 수업을 받았다. 1월부터 시작한 초급반에 합류해 수업을 받았는데 2시간은 워킹 연습을 하고, 2시간은 사진 포즈와 촬영을 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수업은 모두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4월 말이 되자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기념으로 자체 패션쇼를 한단다. 나 같은 경우는 겨우 2개월 수업을 받았을 뿐인데 쇼 무대에 선다고 하니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쇼 무대에 서는 게 이렇게 쉬운가, 라는 의문도 들고. 아무튼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선생님이 짠 동선을 따라 워킹을 하고 정해진 자리에서 포즈를 취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드디어 패션쇼 하는 날이 왔다. TSP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는 수강생 전원이 참여하는 패션쇼인 만큼 고등학생부터 시니어들까지 100여 명이 넘었다. 쇼를 시작하는 시간은 저녁 6시였으나 100여 명이 넘는 수강생들이 다 모여 마지막 현장 리허설을 해야 했기에 12시까지 대한민국 패션의 중심인 동대문 DDP 현장에 갔다. 다들 처음 서보는 쇼 무대인지라 들뜨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나도 모델로서 런웨이를 걷는 느낌이 어떨지, 관객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실수하면 어떡하나 염려되기도 했다. 


  리허설을 마치고 시작 시간이 되자 화려한 조명과 요란한 음악, 빠르게 편집된 영상과 함께 막이 올랐다. 다른 팀이 런웨이 무대에 서는 동안 우리 팀은 무대 뒤에서 옷을 입고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어 나갔다. 배우고 연습한 동선을 따라 런웨이를 걸었다.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멋있다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엄지 척을 해줬다. 난생처음 서본 런웨이. 기분이 묘했다. 흥분되기도 하고.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고. 해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김칠두 씨도 봤다. 그분은 이미 시니어 모델계의 스타였기에 아카데미 수강생 패션쇼에 참여한 것이 좀 의아했으나 나를 모델의 길로 이끈 사람을 보게 돼 반가웠다. 반가운 마음에 무대 뒤에서 인사도 나누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또 다른 사람의 패션을 통해 뭔가를 배우고 느끼고 힌트를 얻기도 했다. 처음 해보는 패션쇼인지라 정신없기도 하고, 생경한 재미에 취하기도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 지루하기도 하고, 내가 뭐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뭐니 모를 이질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화려한 걸 싫어한다. 과대포장을 싫어하고 들뜬 걸 싫어한다. 지나치게 꾸미고 연출하는 걸 싫어한다. 아름다움, 멋짐엔 매력을 느끼나 허장성세, 거품엔 딱 질색이다. 나는 지금껏 삶을 추구해왔다. 근원 진실을 탐구해왔다. 언제나 삶이 그리웠고, 삶에 배고팠고, 삶을 꿈꾸었다. 그래서였을까. 패션쇼라는 낯선 경험이 즐겁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했으나 내가 뭐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뭔지 모를 이질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 아카데미 자체 패션쇼에서 -


  아무튼 쇼는 끝났다. 하루를 온통 쇼에 쏟아붓고 밤늦게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맑고 선명한 생각이 나를 깨웠다.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무대에 서는 것은 내가 바라는 길도, 나와 맞는 길도 아니다. 5월부터 시작하는 중급반 과정에 등록하지 말자. 물론 벼락같은 생각은 아니었다. 2개월 동안 워킹과 포즈를 배우면서도 회의적인 생각이 들랑날랑했었다. 그러다가 쇼를 기점으로 확 불타오른 거였다. 하여, 중급반을 등록하지 않았다. 아니, 단지 등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델의 길을 완전히 포기한 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이 후련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매주 서울 가는 일도 없어지고, 내 작은 공간에서 이전의 일상을 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5월이 가고 6월이 왔다. 한 번은 아내가 물었다. 모델 생각, 나지 않느냐고. 1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말이었다. 믿지 않겠지만 1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곱만큼의 아쉬움도 없었다. 2달의 경험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델 생각을 완전히 털어내고 룰루랄라 이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6월 중순 뜬금없이 모델 아카데미로부터 전화가 왔다. SBS에서 VIP라는 드라마를 찍는데 그쪽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2일을 찍는데 출연료도 준다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된 건지 내막도 모르겠고, 연기 ‘연’ 자도 모르는 사람이 응해서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왔다니 좌우지간 뛸 듯이 좋기는 한데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뭐라 답하기도 어렵고, 해서 생각할 시간도 벌 겸 아내와 상의한 후 연락하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평온하던 가슴이 다시 뛰었다. 무조건 기분이 좋았다. 아내가 퇴근하자 곧바로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얘기했다. 그리고 이 출연 요청을 받아야 할지 뿌리쳐야 할지 물었다. 아내는 별것 가지고 고민한다는 투로 ‘고민할 것 뭐 있어. 배우들도 보고, 어떻게 드라마 찍는지 구경도 할 겸 재미 삼아 가봐’라고 툭 던진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아카데미로 전화했다.     

 

  며칠 후 새벽같이 촬영장에 갔다.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오전을 보내고(배우들만 촬영함) 오후가 돼서야 촬영장에 들어가 촬영 현장도 보고 촬영에도 참여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장나라와 이상윤을 비롯해 얼굴 모르는 여러 배우들이 촬영하고 있었으며, 꽤 많은 스탭이 따라다니며 장면을 찍을 때마다 각종 장비를 이동시키고 조명을 맞추곤 했다. 한 마디로 장난이 아니었다. 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찍는 배우도 힘들어 보였지만 촬영하는 분들의 수고는 열 배도 넘게 힘들어 보였다. 

  촬영장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촬영하는 걸 지켜보면서 옆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잠깐씩 전체 샷을 찍을 때 VIP 고객 행세를 하는 게 전부였다. 눈에 띄지도 않는 짧은 장면을 찍기 위해 이틀 내내 죽치고 있어야 한다는 게 따분하기도 하고 싱겁기도 했다. 하지만 촬영 현장을 지켜보면서, 현장에서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드라마 배후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배우라는 직업이 결코 쉬운 직업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보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수많은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것.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일은 거의 육체노동에 가깝다는 것.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좋은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소개로 드라마에 출연하고 돈까지 받은 만큼 아카데미에 재등록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심적 압박이 느껴졌다. 아카데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등록도 하지 않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압박감을 느꼈다. 하여, 바로 등록하고 중급반에 합류하여 고급반 과정까지 충실하게 수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VIP 촬영을 한 번 더 하고(경남 남해의 경치 좋은 골프장에서), 한국 가수와 중국 가수의 뮤직비디오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같은 반 동료의 권유로 THE LOOK OF THE YEAR 코리아가 주최하는 모델 오디션에 참여했고, 다행히 예선을 통과해 최종 결선까지 진출하여 만족할 만한 상까지 받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내가 그랬다. 친구 따라갔다가 정말 생각지 않은 상을 받았다. 덕분에 모델에 도전한 첫해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 THE LOOK OF THE YEAR 코리아 모델 오디션 최종 결선에서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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