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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양면과 얽힌 삶의 곤욕

    

  우리는 일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삶이 일인지 일이 삶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과 삶이 뒤엉킨 인생을 살아가느라 다들 헉헉거린다. 만일 일에 양면성이 없다면 일과 삶이 지금처럼 뒤엉키지 않을 것이다. 일 때문에 고민하며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면서도 일없음을 두려워하고, ‘일하고 싶음’과 ‘일하고 싶지 않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며 아파하는 것은 일의 종류나 성격과 상관없이 모든 일에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양면이 있기 때문이다. 성서도 일에 양면성이 있다고 말한다.      


  나도 일의 양면성을 경험해봤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무려 8년간을 신학생 신분으로 살았다. 그때가 한참 공부 맛에 빠져들 때여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버스를 타고서도,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약속 장소에서 누구를 기다리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심지어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세상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신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눈떠가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때로 경탄하면서. 때로 희열에 넘쳐서. 60대 중반인 지금도 쉼 없이 책의 저자들과 대화하기를 즐기는 것은 그 대화가 매우 깊고 진실하고 지혜롭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근원 진실에 눈이 뜨이는 경탄과 희열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참 공부 맛을 알아가며 공부의 피치를 올리던 신학대학원 시절, 공부하는 게 온통 기쁨이요 희열이던 그 시절에 의외의 증세가 가끔 찾아왔다. 갑자기 공부하는 게 고역스러웠다. 공부에 뒤따르던 경탄과 희열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려서 너무 의아했다. 이 증세가 뭐지, 자세히 관찰해봤다. 그랬더니 중간고사나 학기말 시험을 볼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시험에 나올만한 걸 골라 외우고,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정해진 답을 찾아 정리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그러다가 시험이 끝나는 날 그 증상도 깨끗이 사라졌다. 시험이 끝나면 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좌우지간 좋았다. 공부의 부담이 없어져서, 공부를 안 해도 돼서 좋은 게 아니라 진짜 공부 - 희열이 있는 공부, 삶을 풍성케 하는 공부, 근원 진실에 눈떠가는 공부를 맘껏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공부가 짐이 아니어서 좋았다. 


  그 시절 나는 시험 기간에 가장 적게 공부하고, 시험이 끝나면 열심히 공부하는 좀 이상한 학생이었다. 지금도 나는 과제를 싫어한다. 시험을 싫어한다. 필기를 싫어한다. 외우기를 싫어한다. 오직 생각하고 묻고 읽고 관찰하고 반추하고 대화하기를 좋아할 뿐.      


  일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공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공부 또한 일이기 때문이다. 스승이신 박윤선 박사님께서 ‘신학생이 공부하다 죽는 것도 순교다. 순교할 각오로 공부하라. 공부하다 죽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나는 그 말씀대로 신학생의 일인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의 양면성을 예민하게 경험했다. 공부라는 일을 통해 일의 성격, 일의 의미, 일의 무게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깊이 체험했다. 분명히 같은 공부인데도 시험을 보기 위해 하는 공부, 점수를 따기 위해 하는 공부, 정해진 답을 외워야 하는 공부, 외적인 필요에 따라 하는 공부는 한 마디로 고역이었다. 반면에 점수와 상관없이 의문과 씨름하는 공부, 근원 진실에 눈떠가는 공부는 전혀 고역이 아니었다. 이 공부는 신나는 모험이자 희열이요 새로운 만남이자 대화였다.      


  얼핏 보면 이 공부나 저 공부나 그게 그거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시험을 위한 공부와 시험과 상관없는 공부는 공부의 성격과 근원이 전혀 다르다. 하나는 지식을 위한 공부고, 하나는 지혜를 위한 공부다. 하나는 점수를 위한 공부고, 하나는 앎을 위한 공부다. 하나는 과정을 마치기 위한 공부고, 하나는 과정이 없는 삶을 향한 공부다. 하나는 외적인 필요에 의한 공부고, 하나는 내적인 필요에 의한 공부다. 하나는 의문과 싸우는 공부고, 하나는 남이 정해놓은 답을 자기 머리에 채워 넣는 공부다. 하나는 능동적인 공부고, 하나는 수동적인 공부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같아 보이는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근원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      

  이처럼 같은 사람이 같은 공부를 해도 공부하는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전혀 다른 공부가 된다. 하물며 일은 어떻겠는가. 공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름의 폭이 넓고 깊을 것이다. 같은 일이라도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따라, 일과 맺은 고용 형식에 따라, 일과 나의 궁합 여부에 따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일을 통해 얻는 보상에 따라 일의 성격이나 만족도가 천차만별일 것이다. 


  더욱이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잘하는 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한다 해도 일 만족도가 100% 일 수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도 연기하는 일이 100%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타고난 피아니스트라도 피아노 연주하는 일이 100%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인이라도 수행하는 일이 100%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자영업자나 직장인은 더할 나위 없을 테고.


  정말이다. 현실에서 일에 만족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여, 눈치 빠른 자들은 두 가지 꿈을 꾼다. 아예 일에서 해방된 삶을 꿈꾸거나 소비가 전부인 삶을 꿈꾼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으로 돈을 버는 삶, 즉 건물주가 되어 월세를 받거나 자본가가 되어 주식으로 돈을 버는 무노동 삶을 꿈꾼다. 일하지 않아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돈으로 소비만 하며 사는 삶을 꿈꾼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꿈이고 바람직한 꿈일까? 이것이 일의 양면성과 얽힌 삶의 곤욕을 극복하는 길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삶은 일에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일인지 삶인지 헷갈릴 정도로 삶과 일은 거의 혼연일체다. 누구도 삶과 일을 깨끗하게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뒤엉켜 있다. 옳다. 일이 곧 삶은 아니지만 일이 없으면 삶도 없다. 인간의 삶은 운명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좌우지간 일로 인해, 일을 통해, 일과 함께일 때 비로소 힘겹게 피어난다. 그런 면에서 일없는 삶? 그건 허깨비다. 일없는 삶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소비가 전부인 삶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가 전부인 삶을 가장 우아하고 멋진 삶이라고 부추기며 홍보한다. 사람들도 소비가 전부인 삶을 부러워하고 꿈꾼다. 그러나 나는 소비가 전부인 삶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한순간도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으나 약간의 상상력을 가동하는 것만으로도, 그 삶이 어떠할지가 훤히 보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솔직히 소비가 전부인 삶은 삶의 축에 끼지 못하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삶의 모양과 형식을 잘 갖추고 있어서 최상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삶의 축에 끼워줄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저열한 삶, 지극히 저능한 삶, 지극히 불행한 삶, 지극히 무력한 삶, 지극히 지루한 삶, 존재의 상쾌함과 성취감을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지극히 비루한 삶이니까. 아니, 삶의 왜곡이요 낭비일 뿐 삶은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 소비가 전부인 삶은 가능할 수는 있으나 바람직하지는 않다.      


  나는 이것이 삶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조금만 눈떠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진실을 외면하는 자들이 꽤 있다. 일하는 삶에 지치고 넘어지며 상처받은 자들 가운데 아예 일없는 삶, 소비가 전부인 삶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 내일 일없는 삶을 살기 위해 오늘 죽기 살기로 일하고, 내일 소비하는 삶을 살기 위해 오늘 죽기 살기로 돈을 버는 자들이 있다. 내일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자산가가 되기 위해 오늘 짠돌이 짠순이로 사는 자들이 있다. 몸은 일에 붙잡혀 살면서 마음으로는 일에서 해방된 삶, 소비가 전부인 삶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 몸과 마음이 양극단에 흩어진 채로 완전히 분열된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일에서 해방된 삶, 소비가 전부인 삶을 꿈꾸는 것으로는 일의 양면과 뒤엉킨 삶의 곤욕을 극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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