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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인간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은퇴는 일차적으로 일에서 물러남, 일을 내려놓음이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단지 일 하나를 내려놓았을 뿐. 그런데 그로 인한 후폭풍은 어마어마하다. 빈곤, 고독, 노화, 문화 지체, 정체성 위기, 일없는 긴긴 시간의 무게까지 문제들이 줄줄이 뒤따른다. 

  도대체 일이 뭐기에 이처럼 엄청난 후폭풍이 뒤따르는 것일까? 일이 뭐기에 다들 일에서 물러나는 은퇴를 두려워하고 정체성까지 흔들리는 것일까? 일이 뭐기에 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면서 동시에 일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대체 일이 뭐기에 ‘일하고 싶음’과 ‘일하고 싶지 않음’ 사이에서 갈등하며 방황하는 것일까? 

     

  먼저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성서를 살펴보자. 성서에는 놀랍게도 인간과 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도 성서 맨 앞에 나온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만물을 창조한 이야기와 함께 인간을 창조한 이야기가 문학적 형식으로 아름답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사뭇 놀랍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제일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하시고, 곧이어 ‘땅과 하늘과 바다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라’ 명하셨다고 말한다(창1:28). 아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을 단지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로 만들기로 뜻을 정하시고, 그 뜻에 따라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말한다(창1:26). 창세기 2장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일구신 후에 사람을 데려다가 그곳을 돌보며 지키게 하셨다고 말한다(창2:15). 즉 사람을 일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몇 있다. 

  첫째, 성서는 일을 창조주의 뜻과 연결한다. 일을 사람의 생존과 연결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 즉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뜻과 연결한다. 

  둘째, 성서는 일을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는 이유를 달리 말하지 않고 오직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현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1:26-27) 이처럼 성서는 일을 하나님의 형상과 직결시킨다. 

  셋째, 성서는 일하는 것이 사람의 존재 이유라고 말한다. 사람은 아무런 임무도 없는 존재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임무, 즉 세상 전체를 경영하는 임무,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을 돌보며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나는 성서의 이런 이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또 사람과 일, 일과 삶이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도 공감한다. 옳다. 일은 사람이 창조주로부터 위임받은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세상을 알고 세상을 조화롭게 경영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임무다. 

  신약성경의 주요 저자인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 후서 3:10)고 말한 것,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앞다투어 일을 신의 소명이라고 주창한 것도 아마 그런 배경에서일 것이다. 사람은 본시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일은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은 지극히 복된 임무라고 성서는 말하니까.   

   

  사실이다.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일한다. 오직 인간만이 뭔가를 돌보고 만들고 디자인하고 기획하고 경영한다. 그런데 일이란 이처럼 특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리 특별할 게 없다. 일이란 그저 살아가는데 필요한 걸 만드는 일련의 활동일 뿐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먹고 · 입고 · 자고 · 싸고 · 놀고 · 쉬고 · 만나고 · 보고 · 읽고 · 재잘거리고 · 배우고 · 이동해야 하는데, 그런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이 곧 일이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은퇴 이후를 고민하는 누군가와 진실을 나누고 싶어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우선 노트북이 있어야 하고, 전기가 공급돼야 하고,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책상이 있어야 하고,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또 노트북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어야 하고, 노트북을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하고, 공장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전기가 있어야 하고,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발전소가 있어야 하고, 발전소를 짓기 위해서는 도로와 항만이 건설돼야 한다. 이뿐 아니다. 노트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재료가 있어야 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재료들을 노트북 생산공장으로 실어 날라야 하고, 재료들을 공장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자동차가 있어야 하고,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외에도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조건들이 갖춰져야 비로소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내가 오늘 아침에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도 아내의 사랑을 비롯해 지구촌 곳곳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이 흘린 땀방울과 태양과 바람을 비롯한 우주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라. 태양 없이 어찌 사과를 먹으며, 바람 없이 어찌 산나물을 먹으며, 농부의 땀방울 없이 어찌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과 우주 전체가 지난한 수고를 하며 협력했기에 아침 밥상이 차려질 수 있었다. 


  무위당 장일순은 이런 우주의 이치를 발견하고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맞다. 모든 것이 우주 전체와 깊이 연결돼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일도 우주 전체와 연결돼 있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우주와 연결되지 않은 일이란 하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일은 인간에게 단지 일이 아니다. 단지 생존 수단이 아니다. 일의 근원을 따져보면,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장엄하고 위대한 무엇이다.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하는 값진 행위이며 아름다운 봉사다. 또 일은 우주와의 협업이다. 일은 곧 삶이다. 일은 곧 자기표현이다. 우리가 애써 추구하는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도 다른 무엇이 아닌 일을 통해 확보되니까. 옳다. 인간에게 일은 자기 존재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는 최상의 방식이며, 영광스러운 존재다움에 걸맞은 창조 행위이고, 세상과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아름다운 기여이자 봉사다.   

   

  심리학자요 교육학자로서 삶의 질을 깊이 연구한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삶의 질은 칠십여 년 동안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51쪽). 저명한 심리학자 도널드 캠벨은 젊은 후학들에게 “돈에 관심이 있거들랑 과학에 뛰어들지 마라. 어떻게든 이름을 날려야 보람을 얻을 수 있겠다는 사람도 과학에 뛰어들지 마라. 명예란 것은 주어지면 고맙게 받을 일이지만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건 일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며 일의 가치와 중요성을 역설했다([몰입의 즐거움]에서 재인용. 83쪽). 

  진실로 그렇다. 사람에게 일이란 의무이자 권리요 책임이자 특권이다. 일은 오직 사람에게만 허락된 창조의 기쁨이자 영광이다. 사람이 일할 때 가장 깊은 몰입을 경험하는 것도 그렇고, 몸과 영혼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마다 일하기를 열망하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의 전부도 아니고 일의 현실도 아니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일의 현실은 창조의 기쁨이나 자기 존재의 표현이기보다 그저 무거운 짐인 경우가 많으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하고, 내적인 번민을 잊기 위해 일하고, 일밖에 할 것이 없어 일하고, 일에 짓눌려가며 일하는 게 대부분이니까. 

  작가들의 플랫폼인 brunch에서 전직 언론인 하륜 씨가 기자 생활 5년 만에 신문사를 퇴사한 이유를 읽었다. 그가 퇴사한 이유는 세 가지였는데 두 번째 이유가 기사를 쓸 때 느끼곤 하는 인지부조화라고 했다. 즉 자기가 쓰고 싶은 기사와 신문사가 쓰길 원하는 기사의 방향이 맞지 않는 데서 오는 내적 갈등 때문에 퇴사했다는 것이다. 

  또 [퇴사는 여행]의 저자 정혜윤은 10년 동안 5번이나 퇴사를 한 이력을 밝히며, 다들 괜찮은 회사였음에도 자기에게 맞는 일, 자기 방식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자발적 방황을 했다고 말한다.      

  맞다. 이것이 일의 현실이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현실에서의 일은 창조하는 기쁨이나 특권이기보다 고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원치 않는 일,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을 꿋꿋이 감내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현대사회에서 일은 돈을 받고 자기 능력과 시간을 파는 거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프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이나 고액 연봉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단체 협약이든 개인 협약이든 고용주와 고용 계약을 맺고 일한다. 즉 일과 돈이 맞거래된다. 그리고 일과 돈이 맞거래되면 일이 돈에 종속돼 일의 부정적인 면이 극대화된다. 자기 능력과 시간을 팔아야 일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리고 자기 능력과 시간을 팔아 일하는 한 하고 싶은 일이나 일하는 시간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가 어렵다는 면에서, 자기 능력과 시간을 팔아 일하는 한 자기 존재와 삶이 억압되고 소외되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면에서, 오늘의 노동 현실은 매우 비극적이다. 은퇴자의 경우는 더 심하다. 일하고 싶은 열정과 능력이 있어도 자기 능력과 시간을 사는 구매자가 없고, 혹 구매자가 있어도 일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면에서 더더욱 비극적이다.    

  

  성경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앞에서 확인한 대로 창세기 1장과 2장에서는 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창조주로부터 위임받은 아름다운 특권, 세상을 경영하는 영광스러운 직임) 말하나 창세기 3장에 가면 일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한 선악과를 따먹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는 날 동안 수고와 고통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창3:16-17),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것(창3:19)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일은 죄와 연루되어 있고, 고통과 수고가 뒤따르고, 먹고살기 위해 안 하면 안 되는 무거운 짐으로 묘사된다.      


  성서는 참 묘한 책이다. 앞에서 한 이야기와 뒤에 하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경우가 참 많다. 같은 책인데 앞에서는 일을 하나님께 위임받은 영광스러운 직임이라 말하고, 뒤에서는 하나님이 내린 저주라 말한다. 그것도 일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이 일은 영광스러운 특권이고 저 일은 무거운 짐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일에도 양면이 있고 저 일에도 양면이 있다고 말한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일의 양면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신음할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자식을 낳는 최상의 일에도 고통이 따른다고 말한다. 그 사람이 선인이든 악인이든, 유력자든 무력자든, 주인이든 종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일의 양면성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참 기막힌 모순이다. 하지만 이처럼 모순된 것이 일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일은 사람에게 축복이자 저주요, 기쁨이자 고통이며, 영광이자 치욕이고, 특권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일하기를 열망하면서 일하지 않기를 꿈꾸고, 끊임없이 일거리를 만들어내면서 일없는 천국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일하고 싶음’과 ‘일하고 싶지 않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일없는 천국을 희망하면서도 일없는 시간(은퇴 이후의 시간)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고.  

    

  흔히 대인관계의 비책으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꼽는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좋지 않다는 말이다. 옳다. 부부건 형제건 친구건 오래가려면 ‘불가근불가원' 해야 한다.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과의 관계 또한 ‘불가근불가원'이 최상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일과 너무 가까워서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일과 너무 멀어서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만큼 ‘불가근불가원'이 일을 대하는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사람은 마땅히 일해야 하나 일에 파묻히면 안 된다는 것. 사람은 일의 주체이지 일의 노예일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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