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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본 은퇴

내적인 은퇴와 외적인 은퇴

 

  은퇴는 결혼이나 취업보다 훨씬 넓고 깊고 의미심장한 변화를 우리 삶에 선물하는 인생사적 사건이다. 그런 만큼 크게 기뻐하고 축하해 마땅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결혼과 취업은 크게 기뻐하고 축하하지만, 은퇴를 크게 기뻐하거나 축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루하루 쇠퇴하고 가라앉을 일만 남은 미래에 연민을 느낄 뿐.

  물론 이해된다. 은퇴를 통해 존재의 단계로 들어간 사람보다 인생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사람들이 훨씬 많고, 또 누구에게나 자기 프레임에 갇히는 성향,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환원주의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은퇴의 참 의미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이해된다. 하지만 아무리 이해한다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은퇴를 지나치게 저평가하고,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왜곡해왔다. 은퇴가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않았고, 한 사람의 생애 주기에서 은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깊이 조명하지도 않은 채 은퇴를 그저 무력한 노년으로 들어가는 첫걸음, 인생의 무대를 떠나 쓸쓸히 사라지는 첫걸음을 떼는 것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은퇴 이후에 살아갈 시간이 인생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는 현실 앞에서 은퇴가 점점 사회의 중심 이슈로 부상하고 있고, 은퇴 이후의 삶에 관해 주목하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은퇴에 대한 보편적 상식 또한 점차 깨지고 있다. 일단은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외면당해왔던 은퇴 이후의 삶이 주목받고 있다는 건 인류 사회 전체를 위해 매우 반가운 일이다. 하여, 나도 이 반가운 일에 숟가락 하나 얹어보려 한다. 지금까지 심히 저평가되고 왜곡되고 외면당해온 은퇴를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려 한다.     


  은퇴란 기본적으로 ‘일을 내려놓음’이다. 일할 힘이 없어서든지, 법이 정한 정년이 돼서든지, 회사의 영업 이익에 별 도움이 안 돼서든지, 일할 마음이 없어져서든지, 경제불황으로든지 …… 사연이야 어찌 됐든 좌우지간 일을 내려놓는 것이 은퇴다. 야구 선수가 큰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는 것처럼, 가수가 노래할 의욕을 잃어 가수 활동을 접는 것처럼, 은퇴는 일차적으로 일과 관련돼 있다. 


  그런데 ‘일을 내려놓음’이 은퇴의 전부일까? 하던 일을 떠나는 것, 하던 일을 내려놓는 것이 은퇴의 모든 것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전부 같아 보이지만,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은퇴에도 사뭇 복잡한 구석이 있다. 현대사회가 과거보다 복잡해졌듯이 은퇴 역시 과거보다 복잡해졌다.      

  사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은퇴의 양상이 단순했다. 은퇴는 대부분 나이의 문제였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나이가 차 노동하기 힘들어질 때쯤 퇴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은퇴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이 30에도 은퇴하고, 40에도 은퇴하고, 50에도 은퇴하고, 60에도 은퇴하고, 70에도 은퇴한다. 심지어 평생 은퇴 없이 현역으로 사는 경우도 많다. 지금은 지식경영 시대, 감성경영 시대, 생활의 질이 아닌 삶의 격이 중요한 시대, 필요를 소비하는 시대가 아닌 취향을 소비하는 시대라서 호기심과 창의력만 바닥나지 않으면 은퇴 없이 평생을 현역으로 사는 게 가능해졌다.      


  또 지금은 퇴직과 퇴사가 일상인 시대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퇴사하기도 하고, 일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퇴사하기도 하고, 어렵게 취업했으나 그 일이 자기와 맞지 않아 퇴사하기도 하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퇴사하기도 하고, 자기 일을 하기 위한 준비용으로 입사한 후 적당한 실무 경험을 쌓고 퇴사하기도 하고, 경직된 조직문화가 맘에 들지 않아 퇴사하기도 하는 등 퇴직과 퇴사가 일상화된 시대다. 그런 만큼 퇴직이 곧 은퇴라는 옛 공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또 지금은 1인 기업 전성시대다. 누구나 창업할 수 있고, 무엇이든 팔 수 있는 시대. 아이든 노인이든 맘만 먹으면 유투버나 SNS를 통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는 시대. 자기 취향이나 취미활동을 팔고, 자기 라이프스타일을 팔고, 자기 스토리를 팔고, 자기 경험을 팔 수 있는 시대. 여행하며 돈 벌 수 있는 시대. 심지어 김치 담그는 것, 아이 양육하는 것, 청소하는 것 등 자기 일상을 영상으로 찍어 돈 벌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일과 일상, 일과 놀이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져 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장에 출근해 일하는 게 대부분이어서 일과 일상, 일과 놀이의 구분이 명확했는데 지금은 점점(코로나 사태 이후 더 앞당겨짐) 직장뿐 아니라 집에서 일하거나 카페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노트북이나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휴가지에서도 일하고, 비행기 안에서도 일할 수 있다.   

   

  그렇다. 지금 이 시대는 은퇴에 나이가 없는 시대, 은퇴와 퇴직이 자유롭고 반복되는 시대, 1인 기업 전성시대, 일과 놀이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 은퇴가 아예 없을 수도 있는 시대다. 그런 만큼 은퇴의 양상이 과거와 달리 꽤 복잡해졌다. 이것이 은퇴다, 라고 선을 긋기가 애매할 만큼.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은퇴의 양상이 훨씬 복잡미묘해진다. 나는 이번에 은퇴 문제를 살피고 또 살피면서 새롭게 발견했다. 은퇴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 은퇴에는 외적인 은퇴와 내적인 은퇴, 둘이 있다는 것. 그리고 두 은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 즉 외적인 은퇴는 단지 ‘일을 내려놓음’(직업으로서의 일, 과업으로서의 일, 직책을 갖고 수행하는 일을 내려놓음)이지만, 내적인 은퇴는 단지 ‘일을 내려놓음’이 아니라 ‘일에 매임에서 해방됨’이라는 것.


  좀 풀어서 말해보자. A가 일을 한다. 일을 하는데 만약 일에 매임에서 해방됐다면 A는 내적인 은퇴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B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는데 만약 일에 매여있다면 B는 내적인 은퇴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또 C는 나이가 젊다. 젊은데 일에 매임에서 해방됐다면 C는 내적인 은퇴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D는 늙었다. 늙었는데 일에 매여있다면 D는 내적인 은퇴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처럼 내적인 은퇴와 외적인 은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용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고, 기준도 다르고, 일과의 관계도 다르다. 외적인 은퇴는 일과 직결돼 있는 반면 내적인 은퇴는 일과 직결돼 있지 않다. 이뿐 아니라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는지 여부도 다르다. 외적인 은퇴를 하는 것으로는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내적인 은퇴를 해야만 삶의 꽃봉오리인 존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은퇴 문제를 살피고 또 살피면서 새롭게 발견한 의외의 진실이다. 은퇴는 의외로 복잡미묘하다는 것. 은퇴의 관건은 일이 아니라 일에 대한 생각과 태도라는 것. 즉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 일에 매여있느냐 매임에서 해방됐느냐, 이것이 은퇴를 판가름하는 중심 잣대라는 것. 그리고 내적인 은퇴를 통해서만 노동의 단계에서 삶의 꽃봉오리인 존재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런 면에서 진정한 은퇴는 외적인 은퇴가 아니라 내적인 은퇴라는 것. 


  그렇다. 은퇴의 진실은 참으로 깊고 현묘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이 진실을 응시하지 않았다. 내적인 은퇴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퇴만 은퇴라고 생각하고 온통 거기에만 골몰했다. 정부도, 언론도, 시민단체도, 기업도, 사회도, 은퇴자 개개인도 온통 외적인 은퇴에만 매달려 지지고 볶았다. 그 결과 은퇴의 의미와 가치를 저평가하고 왜곡하고 외면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삶을 노동의 세계(노동의 단계)에 처박아버리는 불행을 자초했다. 

  이유는 하나다. 내적인 은퇴와 외적인 은퇴를 통시적으로 보지 않고 외눈박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은퇴의 진실을 통째로 보지 않고 외적인 은퇴에만 골몰했기 때문에 은퇴를 우리 삶에 넓고 깊은 변화를 선물하는 인생사적 사건으로 보지 못하고, 하루하루 쇠퇴하고 가라앉을 일만 남은 무력한 노년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으로 잘못 본 것이다.      


  만약 은퇴를 통시적으로 본다면 상황이 많이 개선될 것이다. 은퇴가 가져다주는 선물을 듬뿍 받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에 매임에서 해방되어, 일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 형편과 상황에 따라 일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 일에 매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을 존재(나)나 삶보다 앞세우지 않을 수 있는 힘, 무엇보다 소중한 삶을 노동의 세계에 처박는 보편적 불행에서 해방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의 사례를 보자. 나는 지금도 목사로서 일요일이면 빼놓지 않고 예배하고 설교한다. 성도들과 함께 밥을 먹고 대화한다. 평생 해온 목회를 변함없이 한다. 그러니 외적인 은퇴라는 관점에서 나는 현역 목사임이 분명하다. 

  반면에 나는 마음에서 목회를 내려놓은 지 4년쯤 됐다. 평생 붙잡고 씨름하던 목회, 내 존재와 삶을 다 걸고 달려온 목회를 여러 연유로 마음에서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음이 달라졌다. 이전과 다름없이 목회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전과 달리 목회의 짐에 짓눌리지 않는 편안함이 있다. 목회에 매이지 않고 목회하는 새로운 힘과 자유가 생겼다. 그러니 내적인 은퇴라는 관점에서 나는 은퇴한 목사임이 분명하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현역 목사인가 은퇴한 목사인가? 참 애매하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의 나다. 나는 은퇴하지 않은 은퇴 목사요 은퇴한 현역 목사다. 말은 안 되는데 그렇다. 처음부터 이런 애매한 상태를 목적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마음에서 목회를 내려놓은 지 4년이 지난 지금 와서 보니 나는 은퇴하지 않은 은퇴 목사, 은퇴한 현역 목사라는 조금은 애매한 신분이 됐다. 

  한 마디로 은퇴 여부가 명확지 않은 희미한 상태다. 나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이렇게 희미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은퇴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사람들, 일은 하는데 일에 매이지 않은 사람들, 내적인 은퇴는 했으나 외적인 은퇴를 하지 않은 채 자유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내적인 은퇴를 한 덕분에 3년 전, 목회가 아닌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목사 정병선이 아닌 인간 정병선으로서의 삶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우연히 시니어모델이라는 상상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인생과 삶을 폭넓게 이야기하는 라이프텔러로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해가고 있다. 만약 4년 전에 일에 매임에서 해방되는 내적인 은퇴를 하지 않았다면 목회도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운 도전도 하지 못했을 텐데. 


  그렇다. 내적인 은퇴를 한 덕분에 지금까지 목회를 지속할 수 있었고,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세계를 접하고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는 아주 특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한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은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대로 처음처럼 살 수 있는 은총, 처음이 가져다주는 설렘임을 향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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