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은퇴에 뒤따르는 후폭풍(1)

은퇴는 낭만이 아니다

     

  나는 앞에서 은퇴를 노동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대전환의 문, 노동의 구속에서 해방돼 안식의 품으로 돌아오는 귀향의 문, 삶의 중심 ·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은총의 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눈앞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우리가 은퇴라는 대전환의 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아름답고 조화로운 존재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게 아니라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의 강력한 토네이도가 곳곳에서 휘몰아친다. 자칫 잘못해 토네이도의 중심에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존재와 삶 전체가 산산이 흩어질 수도 있는 무서운 현실이 펼쳐진다. 사실이다. 우리가 은퇴의 문을 통과하자마자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건 은퇴가 몰고 오는 어마어마한 후폭풍이다. 사람들이 은퇴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것도 이 후폭풍 때문이다.    

  

  은퇴가 몰고 오는 후폭풍, 이거 녹록지 않다. 일평생 피땀 흘려 일궈온 생명과 삶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을 만큼 거칠고 무자비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거칠고 무자비한 은퇴의 후폭풍에 휩싸여 곤욕을 치른다. 대체로 다섯 가지 후폭풍을 겪는 것 같다. 


  첫째, 빈곤의 위협이다. 은퇴는 일차적으로 돈 문제다. 은퇴하면 곧바로 매달 들어오는 고정 수입이 사라지니까. 퇴직금을 받아도 그 돈으로 은퇴 이후를 살아가기는 태부족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부동산이나 금융 자산이 있는 사람은 돈 걱정을 안 해도 되겠지만 평생 월급쟁이로 산 사람은 은퇴한 다음 날부터 돈 걱정을 해야 한다. 연금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형편이 괜찮은 편이나 연금마저 부실한 사람은 아예 살길이 막막하다. 

  지금 은퇴하는 50-60대를 가리켜 ‘마처 세대’라고들 한다. 베이비붐 세대인 50-60이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의 50-60은 은퇴한 후에도 자기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은퇴 후에 재취업하는 자들이 많다. 각종 국가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자들도 청년보다 은퇴자가 많고, 2021년 국가자격증 시험 합격자도 50대 이상이 가장 많을 만큼 요즘 은퇴자들의 재취업 열기가 뜨겁다. 

  이것이 은퇴자가 만나는 첫 번째 현실이다. 은퇴는 곧장 빈곤으로 연결된다. 먹고사는 일에 더 얽매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수입이 줄면 마음과 정신이 위축되고 어깨도 축 처진다. 자연히 소비를 줄이고, 욕망을 줄이고, 인간관계를 줄이고, 일상생활도 줄여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총체적 빈곤의 위협 앞에 점점 더 노출된다.      


  둘째, 고독이다. 은퇴하면 일과 엮였던 인간관계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바쁘게 일할 때는 주변에 사람이 넘쳤던 사람도 은퇴하고 나면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점차 줄어든다. 맘 편히 만날 사람을 꼽아봐도 딱히 꼽을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심하면 가족에게조차 찬밥 신세로 외면당하기 일쑤다. 다들 웃자고 하는 얘기겠으나 흔히 ‘이사 갈 때 강아지는 챙겨도 남편은 챙기지 않는다’고들 한다. 남편 호칭도 ‘집에서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 한 끼 먹으면 일식씨, 두 끼 먹으면 두식이, 세 끼 다 먹으면 삼식이새끼, 그것도 모자라 종종 간식까지 찾으면 종간나새끼’라고 한단다. 웃자고 하는 유머지만 뼈아픈 진실, 은퇴한 남자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웃픈 진실이 녹아 있어 씁쓰레하다.   

   

  셋째, 노화로 인한 몸의 쇠약이다. 사람은 일차적으로 생물학적 존재다. 정신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이와 함께 체력이 떨어지고, 몸이 둔해지고, 한두 군데씩 고장이 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노력에 따라 노화의 속도를 좀 늦출 수는 있겠으나 노화를 영영 피할 수는 없다. 목사이자 저술가인 쿠르트 마르티는 “노년에 영적이 된다? 결코 아니다. 몸으로 하는 일, 무엇보다 쇠약해짐으로 인해 불쾌한 일들이 급증한다.”라고 말하며, 자기는 더 이상 휘파람을 불 수 없고,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고, 삶의 기쁨도 줄어든다고 토로했다.(노년을 위한 마음. 피델리스 루페르트. 155쪽. 재인용) 요즘 나이 든 사람들이 술잔을 부딪칠 때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죽자는 뜻으로 ‘구구팔팔이삼사’를 외친다고들 하는데 어디 그러기가 쉬운가. 나이와 함께 노화가 촉진되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그로 인해 삶이 으깨어지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명의 순리다.      


  넷째, 문화 지체다. 이 시대는 빛의 속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그에 발맞춰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세상이다. 변화에 발 빠른 사람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의 폭은 광대해지고, 변화의 주기는 짧아지고,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 신조어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다 보니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헉헉대는 문화 지체 현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특히 은퇴 후 빈곤과 고독에 처하게 되면 생각도 뒤처지고, 행동양식도 뒤처지고, 자잘한 일상의 변화에도 뒤처지는 문화 지체 현상이 가속화된다. 기차표나 영화 티켓을 예매하는 것부터 자잘한 행정민원을 처리하는 것까지 거의 모든 게 첨단기술과 접목돼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경우가 많아진다. 신조어를 따라잡기도 어렵고 세대 간에 어법도 달라서 소통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처럼 문화 지체 현상이 점차 일상으로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고, 노인은 점차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가 되어 간다.     

 

  다섯째, 정체성 위기다. 사람은 보통 자기 존재감, 자기 정체성을 자기가 하는 일에서 찾는다. 일을 통해 자기 존재감을 확인한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사라져 버리면 일을 통해 확인하고 견지했던 자기 존재감, 자기 정체성이 흔들린다. 쓰임새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하찮은 사람이라는 열등감에 빠지게 되고, 의욕과 의지가 점차 박약해진다. 심하면 우울과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결혼과 함께 사직한 분의 얘기를 들었다. 이분은 결혼 후 군목으로 근무하는 남편의 임지를 따라 군부대가 있는 산골 생활을 전전했다는데 결혼 후 15년 정도를 그렇게 산골에 갇혀 살다 보니 점점 고립되어 가는 느낌이 들고, 자기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이 되고, 마음은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하고 싶은데 현실은 남편의 교회 일을 돕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힘들었다고 한다. 나는 하찮은 사람이라는 생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사라져 힘들었고, 그런 탓에 오랜 시간 열등감과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혼 후 처음으로 도시 군부대로 임지를 옮기면서 기간제 교사로 일할 수 있게 됐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니 너무너무 감사해서 몸은 피곤해도 즐겁게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듣다가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물었다. 일을 못 하다가 일을 하게 되니 어떻던가요, 물으니 열등감과 불면증이 한 쾌에 해결됐다, 몸은 바쁘고 힘들지만 마음은 너무너무 뿌듯하고 행복하다, 계속 일하고 싶다는 대답이 속사포처럼 나왔다. 

  나는 이분의 얘기를 들으며 자기 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 또 이 차이가 자기 존재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은퇴란 단지 ‘일에서 물러남’이 아니라 ‘일과 하나였던 존재에서 물러남’이라는 것도 함께.      


  지금까지 은퇴에 뒤따르는 후폭풍 다섯 가지를 살펴봤다. 경제적 빈곤. 고독. 몸의 쇠약. 문화 지체. 정체성 위기. 하나하나가 다 만만치 않은 후폭풍이다. 한 사람의 존재와 삶은 물론이고 한 가정과 가족의 삶까지도 뒤흔들 수 있는 후폭풍이다. 단지 일 하나를 내려놓았을 뿐인데 뒤따르는 후폭풍은 온 하늘을 뒤덮는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결정적인 후폭풍 하나가 더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잠시 한숨 돌린 후 계속 살펴보자.                

이전 09화 은퇴, 대전환의 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