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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에 뒤따르는 후폭풍(2)

일없는 시간을 사는 문제

 

  잠시 한숨 돌렸으면 얘기를 이어가 보자. 은퇴에 뒤따르는 여섯 번째 후폭풍은 일없는 시간이다. 이 후폭풍은 과거엔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퇴 이후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니까. 은퇴 후 잠시 가족들의 부양을 받다가 60세 전후쯤 죽었기 때문에 딱히 권태로울 시간이 없었고, 그런 만큼 일없는 시간 때문에 고민할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인간의 평균 수명이 1900년보다 30년 이상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00시 시대인 지금은 은퇴 후에 20-40년을 살아야 한다. 재수 없으면 50년 이상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그것도 직책 하나 없는 순수 인간으로서, 일없이 늙어가는 인간으로서 은퇴 이후의 길고 긴 시간을 살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은퇴에 뒤따르는 여섯 번째 후폭풍이며, 100세 시대의 은퇴자들이 가장 깊이 고민해야 할 핵심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것이 왜 문제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일없이 자기 살고 싶은 대로 맘껏 살아보는 것, 그것도 오랜 시간을 살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 아니냐, 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이다. 일없이 오래 사는 것, 우리 모두 소원하는 바다. 그러나 일없이 사는 것처럼 고약한 일도 없다. 사람이 일없이 놀면서 30-50년을 산다는 것,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굉장한 내공이 아니고서는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     

  아내와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퀭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노인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어떤 호기심도 없이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표정 없는 얼굴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속절없는 무엇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연민을 넘어 쓰라린 통증 같은 게 올라온다. 하루가 얼마나 길까, 얼마나 지루할까,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얼마나 권태로울까 상상이 되고, 나는 도저히 저렇게 살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면 절로 가슴이 아려온다. 동시에 그분들께는 예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 저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라 형벌일 수 있다는 생각,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미래가 저 상황이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생각까지 마구 뒤섞이면 뭐라 표현하기 힘든 쓰라림, 슬픔, 애잔함, 두려움 같은 게 올라온다.   

   

  이재용 감독이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가 이 문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몸 파는 늙은 여자로 분한 주인공 윤여정이 세 노인의 죽음을 도와주는 이야기다. 영화에 나오는 세 노인은 처한 상황이 제각각 다르다. 


  첫 번째 노인은 돈도 있고 멋도 낼 줄 아는 부자 영감이다. 자식도 미국에서 잘 나가는 세칭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중풍으로 쓰러져 요양원에 들어간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몸으로. 돈도 있고 자식도 있으나 혼자서는 밥도 먹을 수 없고, 똥도 쌀 수 없는 철저히 의존적인 유아 상태로 떨어졌다. 노인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윤여정에게 ‘제발 나를 죽여줘. 나를 도와줘’라고 통사정을 한다. 윤여정은 처음에 펄쩍 뛰었으나 곰곰이 생각한 끝에 노인의 청을 받들어 죽여준다. 


  두 번째 노인은 아주 건장하게 생겼다. 평생 병치레라고는 안 해보고 산 사람 같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치매에 걸려 점차 인지 능력을 상실해 간다. 방금 약을 먹고도 약 먹은 걸 기억 못 해 또 먹으려 한다. 시간과 함께 좀 더 악화하면 자기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친구(전무송 분, 영화 속 세 번째 노인)는 이 노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윤여정에게 ‘저 친구 좀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윤여정은 이번에도 펄펄 뛰면서 그럴 수는 없다고 거부한다. 하지만 결국 셋이서 함께 산에 올라 치매 걸린 노인을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 죽여준다. 


  전무송이 연기한 세 번째 노인은 아내와 자식을 먼저 저세상에 보내고 혼자 남아 꾸역꾸역 살아간다. 기력이 약해져 섹스조차 할 수 없는 몸으로 하루하루 살아내고는 있지만, 딱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다가 결국 너무도 비루하고 비참한 삶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혼자 죽는 것이 너무 무섭고 외로워 죽음을 결행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 노인 역시 윤여정을 죽음의 자리에 초대한다. 혼자 죽기 무서우니 죽을 때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좋겠다고. 윤여정은 전무송의 제안을 받아들여 호텔에 함께 들어가고, 전무송은 윤여정에게 준비한 수면제 한 알을 건네고 나머지는 자기 입에 털어 넣은 후 반듯하게 누운 채 길고 긴 잠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영화 속에서 일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노인의 현실을 봤다. 그 현실이 얼마나 처참하고 남루하고 무거울 수 있는지를 봤다. 길고 긴 시간의 무게, 특히 일없는 시간, 의미를 찾기 어려운 시간, 남루하게 추락한 존재의 비참함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의 무게를 봤다. 세 노인은 하나 같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일없는 시간의 저주에 신음하고 있었다. 일없는 시간을 힘겹게 견디다가 시간을 죽이는 것으로 권태로운 시간을 끝내고 있었다. 일없는 시간을 죽이는 것만이 저들의 구원 인양.      


  이것은 단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인류가 새롭게 직면한 현실이다. 우리는 은퇴 후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한다. 몇몇 사람은 은퇴 없이 평생 일하는 혜택을 누리겠지만 거리의 장삼이사들은 은퇴 후 일없는 시간을 오래 살아야 한다. 그것도 빈곤에 허덕이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독을 곱씹으며. 문화 지체라는 일상의 비애를 감내하며. 쇠약해가는 몸을 추스르며. 정체성 위기에 흔들리며.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시간의 위태로움에 대하여 말했다. “어둠의 군주가 거느린 신하들 중 가장 무서운 녀석이 시간이다. 시간은 우리를 서서히 지치게 만든다. 시간이 너무 길어서가 아니다. 너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신과 악마 사이. 34쪽) 


  그렇다. 일없이 살아야 하는 긴긴 시간. 사람들은 이것을 복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이것이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핵심 문제요 100세 시대 인류가 풀어야 할 새로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문제는 인류의 오랜 진화 과정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초유의 사태다. 100세 시대가 현실화하면서 도드라진 의외의 문제다. 그런 만큼 대처할 지혜도 축적되지 않았고 적절한 해법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들 백수가 과로사하는 방식으로 우스꽝스럽게 해결하는 듯하다.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시간을 물 쓰듯 심심풀이에 쏟아붓거나 돈으로 시간을 먹칠하는 듯하다. 이런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 “너무 바빠서 백수 못 해 먹겠다.”는 말 말이다. 뭐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정색하고 달려드는 꼴 같아 뭐하긴 한데 이 말의 숨은 배경을 파 들어가 보면, 일로 시간을 채우지 못하는 현실을 방어하려는 무의식적 방어심리와 무엇으로든 시간을 채우겠다는 의욕의 과잉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없는 시간의 문제를 바쁨으로 덮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은퇴 이후에 자기 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사회적 성장이 아닌 내적 성장을 해야 하는데. 은퇴 이후야말로 진짜 자기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인데. 이 최고의 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누구는 화려하고 멋진 심심풀이들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고, 누구는 시간의 강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고, 누구는 시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대고 있고, 누구는 시간의 권태로움에 짓눌려 목숨을 끊고 있다.  

    

  지금까지 은퇴에 뒤따르는 후폭풍 여섯 가지를 살펴봤다. 단지 일 하나를 내려놓았을 뿐인데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는 일파만파다. 경제적인 빈곤 문제를 비롯해 고독 문제, 노화에 따른 건강 문제, 문화 지체 문제, 정체성 위기 문제, 그리고 은퇴 후 오랜 시간을 일없이 살아야 하는 문제까지 실로 일파만파다. 


  이것이 은퇴의 현실이다. 은퇴는 노동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기보다 존재의 위기로 들어가는 문이기 십상이다. 은퇴 이후 자기 걸음을 걸으며 삶의 깊은 맛을 향유하기보다 은퇴의 후폭풍에 휘둘리며 무료하고 무기력한 삶으로 추락하기가 십상이다. 은퇴 이후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 은퇴 이후의 시간을 은퇴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충만하게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은퇴 이전과 비슷하거나 은퇴 이전보다 훨씬 비루하고 누추하게 산다. 은퇴의 후폭풍에 휩쓸려 삶 전체가 거덜 나는 경우도 적잖이 있다. 

  20세기 유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정확히 말했다. “우리의 비극은 미처 제대로 살아보기도 전에 죽는다는 것”이라고. 정말이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보기도 전에 죽는다. 우리가 알고 경험해야 할 진짜 생(生)의 세계인 존재의 단계에 들어가기도 전에, 삶의 꽃봉오리를 피워보기도 전에, 노동의 단계를 맴돌다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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