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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하며 살지?

왜 일없음을 두려워할까??

   미시 역사 연구의 선구자 시어도어 젤딘은 [인생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말했다. 

  “우리는 일상의 중압감에 눌려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대화를 회피할 때가 많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장 적게 논의한다.”(53쪽) 


  나도 살면서 뼈저리게 경험했다. 사람들이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다양한 예술을 접하는 순간에 잠시 삶의 근본적인 문제(물음)를 환기하긴 하나 일상에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물음)와 씨름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더라. 끽해봐야 일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를 하는 정도이고, 나머지는 그렇고 그런 연예인 이야기나 누군가를 씹는 험담이나 시시껄렁한 신변잡담이나 떠도는 정보를 늘어놓더라. 누군가가 좀 심각한 표정으로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꺼내기라도 하면 ‘야, 인생 뭐 있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 뭐!’라며 딴전을 피우거나 귀를 닫아 버리기 일쑤더라.     


  은퇴 문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은퇴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의 은퇴 자금을 모으고 불리는 방법, 은퇴 이후 일자리 문제와 건강 문제에 관한 것들이었다. 은퇴가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은퇴 이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은퇴 이후의 삶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은퇴 이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지를 깊이 고민하거나 논의하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듣지 못했다. 선배 목사들이 은퇴 문제로 대화하는 걸 엿들어봐도 돈 문제와 건강 문제가 오갈 뿐 그 이상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심히 아쉽고 안타까웠다. 진짜 문제를 봐야 한다. 진짜 문제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정직하게 묻고 숙고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깊어지고 삶이 무르익는다.      


  앞에서 은퇴의 후폭풍을 말했다. 특히 ‘일없는 시간’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후폭풍이라고 말했다. 내가 은퇴를 생각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묻고 고민한 것도 바로 그 문제였다. 4년 전 목회자의 삶을 내려놓는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온 물음이 ‘그럼 뭐하며 살지?’였다. 앞으로 최소 20년은 더 살 텐데 그 세월을 뭐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물음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이 물음은 매우 단순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물음 속에는 세 가지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럼’에는 목회를 내려놓은 이후의 시간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고, ‘뭐하며’에는 은퇴 이후의 시간을 채울 일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고, ‘살지?’에는 일없는 삶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다. 물론 이런 고민을 충분히 의식하며 물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럼 뭐하며 살지?’라는 물음 속에는 일없이 살아갈 긴긴 시간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일없는 삶에 대한 깊은 회의와 혐오가 깔려 있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자. 왜 다들 일없는 삶을 혐오하고 회의하는 것일까? 왜 다들 일없이 사는 시간을 부러워하기보다 외려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일까? 일이 없으면 돈을 벌지 못해서일까? 일없는 시간이 무의미해서일까? 일없는 시간이 지루하고 무료해서일까? 일없이 빈둥거리는 것이 한심해 보여서일까? 정녕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일없이 빈둥거리는 인간보다 한심하고 추레한 인간이 없고, 일없는 시간보다 더 공허하고 무료하고 권태로운 시간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을 대하는 생각과 태도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즉 일의 위상이 지나치게 높아졌기 때문이고, 우리 사회가 일 중심 사회로 구조화됐기 때문이라고.      

  우리 삶을 한 번 들여다보자.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거의 일에 미쳐 살고, 일에 지쳐 산다. 일에 의해 평가받고, 일을 통해 성취감과 자존감을 확인하고, 일을 통해 사회적 지위와 관계의 네트워크를 획득한다. 또 어디를 가나 일이 많은 사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일이 많은 사람은 유능한 사람으로 통하고, 일이 없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으로 통한다. 심지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고 게으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한 사람을 볼 때도 인격의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해온 사람인지를 중심으로 본다. 이뿐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위상이 결정되고, 인간관계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렇다. 현대사회는 사회 구석구석이 일에 의해 구성되고, 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진다. 삶의 리듬도 일을 따라가고, 주거 공간도 일을 따라가고, 심지어 결혼까지도 동종업종 커플이 늘어날 정도로 일을 따라가고 있다.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일 중심 사회, 일 지향 사회다.      


  물론 사람이 일하지 않고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일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이 삶의 중심이지는 않았다. 우리 문명이 산업화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일은 삶의 중심이 아닌 주변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은 예로부터 저주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이나 우리 선조들만 해도 일하는 사람을 천대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존경받고, 일하는 사람은 홀대받았다. 양반은 일하지 않고 노예나 종이 일했다. 


  그런 만큼 누구도 일없는 삶을 저주하지 않았다. 누구도 일없는 시간을 혐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누구도 일없는 시간 앞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불과 150년 전(조선 시대 말)만 해도 양반이 일하는 건 수치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일하는 사람이 능력자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확고부동해진 지금, 사람들은 일없이 사는 것을 수치요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일없는 시간을 꿈꾸고 부러워하기는커녕 일없는 시간을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마음 한편으로는 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면서도 더 깊은 곳에서는 일로부터의 자유를 두려워한다. 아니, 일로부터의 자유보다 일할 자유를 더 열정적으로 갈망한다.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왜 그럴까? 대체 왜 일없는 삶, 일없는 시간을 부러워하기보다 외려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일까? 왜 내남없이 일없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것일까? 왜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일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존재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것일까?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일의 위상이 지나치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본래 신의 저주요 벌이었던 일이 16세기에 신의 소명으로 바뀌더니 19세기부터는 그 이상으로 높아져 존재와 삶의 중심, 사회의 중심이 됐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 사회가 일 중심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우리 정체성과 삶까지도 일에 의해 좌지우지될 만큼 철저하게 일 중심 사회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셋째, 인간이 일에 종속됐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일 중심 사회로 재편되면서 인간을 평가하는 관점도 일 중심으로 바뀌어, 과거에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가 대접받은 데 비해 지금은 호모 파베르(일하는 인간)가 대접받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유심히 들여다보라. 어떤 사람이 대접받고 환영받는지. 정부, 기업, 군대, NGO, 방송, 언론, 연예계는 말할 것 없고 학교와 가정에서도 어떤 사람이 인정받고 환영받는지.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은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오직 열심히 일하는 인간(호모 파베르)만이 환영받는다. 오직 호모 파베르에게만 제값을 쳐준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이 우선인 사회가 아니라 일이 우선인 사회다.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일이 중심인 사회다. 사람이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일이 시간의 주인인 사회다. 이처럼 사회의 중심, 시간의 주인이 사람이 아닌 일이기 때문에 학생이건 청년이건 직장인이건 은퇴자건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일없는 시간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일없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것이다. 호모 파베르가 되지 않으면 심각한 자존감의 위기, 관계의 위기, 안정의 위기를 겪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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