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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 그 미묘함에 대하여

일, 있어도 문제요 없어도 문제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 아니, 우주 그 이상이다. 우주보다 더 심오하고 오묘하고 다차원적이다. 당연히 먹고사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인간은 먹고사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간절히 열망한다. 세상 모든 것의 이치를 이해하고 싶어 하고, 뭔가 결핍과 필요가 보이면 기어이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고, 자기를 비롯해 우주 만물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묻고 찾으려 하고, 자기 삶을 아름답게 경영하고 싶어 하고, 뭔가 자기만의 기여를 통해 자기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하고, 뭔가를 바꾸고 싶어 한다. 참 묘하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먹고사는 것 이상의 뭔가를 쉼 없이 열망하고 욕망한다.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만약 인간에게 먹고사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간절히 열망하는 게 없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일이라고 해봤자 생존에 필요한 단순 노동이면 충분할 것이다. 호랑이처럼. 코끼리처럼. 개처럼. 새처럼.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에게는 다양한 열망, 끝없는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인간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끝없이 도전하게 하고, 탐구하게 하고, 만들게 한다. 배와 비행기를 만들게 하고, 컴퓨터를 만들게 하고, 망원경을 만들게 하고, 사회를 조성하게 하고, 도시를 건설하게 하고, 국가를 이루게 하고,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게 하고, 온갖 것을 만들게 한다. 즉 일하게 한다. 온갖 일을 끝없이 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일은 욕망과 열망의 산물이다. 그리고 인간이 욕망하고 열망하는 존재인 한 일하지 않고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가능하지도 않다. 작가 알베르 카뮈가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라고 말한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옳다. 인간은 일없이 살 수 없다. 능력이 많든 적든,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은 좌우지간 일해야 한다. 일하지 않으면 늙는다. 일하지 않으면 무력해진다. 일하지 않으면 존재의 위엄이 사라진다. 일하지 않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일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일하기 위해 태어났기에 일없이 살 수 없는 것일까? 일하기 위해 태어났기에 일하지 않으면 존재의 위엄이 사라지고 삶 전체가 타락하는 것일까? 절대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 못했다고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니까인간은 일보다 큰 존재이니까. 옳다. 인간은 일보다 큰 존재다. 일보다 숭고한 존재다.      


  그렇다면 당연하다. 일이 인간 위에 있을 수 없다. 아니, 인간 위에 있으면 안 된다. 일이 삶의 목적이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일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일과 삶이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밥과 똑같다.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밥이 인간 위에 있을 수 없고, 밥이 삶의 목적일 수 없듯이 일도 그렇다. 일이 인간의 존재 이유나 삶의 목적일 수 없다. 즉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이 없어도 안 되고, 일이 전부(목적)여도 안 된다. 일이 너무 멀어도 안 되고, 일이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사람과 일의 관계는 너무나 오묘해서, 일이 없으면 일에 목말라 죽고 일이 많으면 일에 짓눌려 죽는다. 그러므로 사람과 일 사이에는 항상 팽팽한 긴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을 통해 사람이 복을 받고, 사람을 통해 일이 복을 받을 수 있다.      


  또 일을 통해 사람이 복을 받고, 사람을 통해 일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일하는 사람과 일 사이에 궁합이 맞아야 한다. 사람 간에 궁합이 맞아야 행복할 수 있듯이 사람과 일 사이에도 궁합이 맞아야 일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고, 일의 성과 또한 좋을 수 있다. 

  변호사를 생각해보자. 변호사는 분명히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군에 속한다. 하지만 좋은 직업군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직업과의 궁합이다. 그러니까 변호하는 일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거나 잘하는 일일 경우, 즉 궁합이 맞을 경우, 그 사람은 일하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일을 통해 자아가 확장되고 존재감이 채워지는 행복감을 느낄 것이고, 일의 성과 또한 좋을 것이다. 

  반면에 변호하는 일이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거나 잘못하는 일일 경우, 즉 궁합이 맞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은 일하는 것이 즐겁지 않을 것이다. 일을 통해 자아가 확장되거나 존재감이 채워지기는커녕 자신감을 잃고 존재가 위축되는 자기 소외를 경험할 것이고, 일의 성과 또한 좋지 않을 것이다. 

  일이란 게 그렇다. 일은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일이 일로 끝나면 참 깔끔하겠는데 도대체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일은 놀랍게도 인간과 삶을 UP 시키기도 하고 DOWN 시키기도 한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인간과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일과 DOWN 시키는 일은 그 양태가 꽤 다르다.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일은 보통 일과 놀이, 일과 삶, 일과 쉼, 일과 창조, 일과 예술, 일과 배움이 함께 어우러지는 데 비해, 인간과 삶을 DOWN 시키는 일은 보통 일과 놀이, 일과 삶, 일과 쉼, 일과 창조, 일과 예술, 일과 배움이 날카롭게 대립해 있다.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일은 일의 주체가 대체로 자기다. 그래서 자기에게 맞는 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누군가의 결핍과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다. 매 순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지만 동시에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고 일을 상대화하며, 일이 삶을 위협하지 않도록 조정한다. 또 전인이 일에 참여하기 때문에 창의적으로 일하고, 능동적으로 일하고, 기쁘게 일한다. 일을 통해 삶이 풍성해지는 복을 누린다. 

  반면에 인간과 삶을 DOWN 시키는 일은 일의 주체가 대체로 자기가 아니다. 그래서 스스로 일을 찾는 게 아니라 고용주가 요구하는 일, 자기에게 부과된 일, 먹고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한다. 일과 삶을 조정하지 못한 채 일에 끌려 살고 묶여 산다. 또 전인이 일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일의 진정한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그저 습관적으로 일하고, 피동적으로 일하고,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일한다. 일에 의해 삶이 파괴되고 소외되는 아픔과 상실을 겪는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일은 단지 일이 아니다. 단지 돈벌이가 아니다. 단지 생존 수단이 아니다.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일은 인간과 삶을 풍성케 하는 일상의 예술이 되고, 아름다운 봉사가 되고, 기막힌 창조가 되고, 깊은 배움이 되고, 삶이 된다. 한 마디로 일과 일하는 사람 사이에 틈이 없다. 소외가 없다. 

  반면에 인간과 삶을 DOWN 시키는 일은 인간과 삶을 풍성케 하는 일상의 예술이나 아름다운 봉사나 기막힌 창조가 되지 못한다. 일을 통해 깊은 배움을 얻지도 못하고 삶을 경험하지도 못한다. 일은 오직 일일 뿐이고, 오직 돈벌이일 뿐이고, 오직 생존 수단일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한 마디로 일과 일하는 사람 사이에 거대한 틈이 있다. 소외가 있다.      


  이처럼 같은 일이라도 일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어떠냐, 일과 사람 사이의 궁합이 어떠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일이 될 수 있다.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고 DOWN 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일을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다. 일을 인생 평가의 주요 잣대로 삼는 이유다. 


  옳다. 일은 인생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인생은 나 · 일 · 사회 · 역사 · 문화라는 변수들이 복잡 미묘하게 얽혀 형성되는 고차원 함수방정식이다. 나 · 일 · 사회 · 역사 · 문화라는 변수들이 어떻게 얽히고설키느냐에 따라 다종 다양한 모습으로 다채롭게 펼쳐지는 고차원 함수방정식이다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말하는 것도 나 · 일 · 사회 · 역사 · 문화를 비롯한 여러 변수들이 워낙 복잡 미묘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복잡 미묘한 인생의 한 복판에서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나를 통해 일이 복을 받고일을 통해 세상이 복을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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