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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

은퇴 이후의 두 갈래 길

     

  지금까지 줄곧 은퇴 이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가 진짜 삶을 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요, 삶이라는 꽃봉오리를 피울 수 있는 영광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근원 진실에 눈뜰 수 있는 시간, 진짜 삶을 향해 거짓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시간, 안목이 넓어지고 깊어지며 높은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는 성장의 시간, 자기 안의 다양성을 발견하고 자기 밖의 다양성까지 품을 수 있는 성숙의 시간, 일과 성취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은퇴의 후폭풍에서 말했다시피 은퇴 이후에 이런 삶을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경제적 형편이 여유롭다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경제적 형편이 넉넉하든 빠듯하든 관계없이 은퇴 이후의 삶을 보면 크게 두 방향으로 양상이 나뉜다. 생애주기의 마지막 단계인 존재의 단계로 나아가며 삶의 질이 격상하는 부류가 있고, 자기 경험과 판단을 고집하며 자기 안에 유폐되는 쪽으로 삶의 질이 추락하는 부류가 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라.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닐지라도, 은퇴를 통해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자기를 더 깊이 알고(자신의 허물과 한계까지), 자기 걸음을 걸으며 삶의 깊은 맛을 향유하고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 은퇴 이후에 삶의 정상에 오른 사람, 존재의 아름다움이 농익어가는 사람이 있다. 생애 중 가장 충만한 나날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은퇴를 통해 존재의 위기로 내몰리는 사람이 있다. 자기 안에 갇혀서 편견의 벽을 높이 쌓고 고집스럽게 세상만사를 훈계하는 사람이 있다. 은퇴 이후에 삶이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사람, 빈곤과 건강 악화와 역할 부재로 존재의 빛이 어두워지고 추악해지는 사람이 있다. 가족이나 사회의 짐으로 전락한 채로 생애 중 가장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   

  

  분명히 같은 은퇴를 했는데 은퇴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삶이 그렇다. 인간의 삶은 매우 독특해서 은퇴 이후에 그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진다. 은퇴 이전에는 지위의 격차, 외모의 격차, 성격의 격차, 지식의 격차가 크게 도드라지고 삶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은 데 비해, 은퇴 후에는 지위의 격차, 외모의 격차, 성격의 격차, 지식의 격차는 줄어들고 삶의 격차는 크게 벌어진다. 

  보니파스 티길라는 이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노인들이 시인 아니면 얼간이, 철학자 아니면 바보, 또는 삶의 상황으로 인해 숙고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무감각한 사람들이라고 감히 확언한다.”(노년을 위한 마음 공부. 피델리스 루페르트. 36쪽. 재인용)


  옳다. 은퇴는 단지 일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은퇴는 그동안 나를 감싸줬던 학력, 경력, 지위, 소유, 업적 등을 다 벗고 알몸인 나, 오직 나일뿐인 나로 돌아오는 것, 즉 나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롭게 나로 회귀하는 사람은 은퇴 이후 존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나, 나로 회귀하지 못하는 사람은 은퇴 이후 존재의 위기로 내몰릴 수 있다. 나로 회귀하는 사람은 은퇴가 결혼이나 취업보다 훨씬 깊고 의미심장한 대전환을 일으키는 인생사의 중심 사건일 수 있으나, 나로 회귀하지 못하는 사람은 은퇴가 끝없는 추락과 존재의 소멸로 내몰리는 인생사의 막장일 수 있다. 은퇴를 어떻게 맞이하느냐, 은퇴 이후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은퇴 이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고, 그 결과는 천양지차로 벌어진다.      


   그렇담 은퇴 이후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단지 사는 것을 넘어 삶이라는 꽃봉오리를 피울 수 있을까? 또 은퇴 이후에 일을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일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적당한 일을 하는 것이 몸 건강이나 정신 건강에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원칙적으로는 일을 상대화해야 한다. 은퇴 이후에도 일 욕심을 내며 일 중심으로 사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은퇴 이후의 삶이 일 중심, 일 우선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은퇴 이후엔 새로운 일, 적당한 일을 찾는 노력보다 ‘일없는 시간을 잘 사는 법’, 즉 ‘존재의 세계를 사는 법’, ‘나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긴요하다.      

  왜냐면 적당한 일을 찾는 것은 은퇴 이전까지 살아왔던 노동의 단계를 좀 더 지속하는 것에 불과한 데 반해, ‘존재의 세계를 사는 법’, ‘나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노동의 단계에서 존재의 단계로 넘어가는 삶을 배우고 연습하는 것이니까. 


  사실 단순한 시간의 연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의 내용이나 깊이나 격이 변화하지 않는 시간을 오래 사는 것은 권태와 지루함만을 가져다줄 뿐이며, 권태와 지루함으로 늘어진 시간을 사는 것은 견디기 힘든 끔찍한 재앙 중 하나이고, 자기 존재에 대한 모독이니까. 


  하여, 나는 은퇴 이후에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적당한 일을 찾는 것보다 ‘존재의 세계를 사는 법’, ‘나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은퇴 이후의 시간을 새롭고 풍성하게, 노년의 몸으로도 존재의 위엄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에.      


  결국 인생의 관건은 삶이다. 생명을 사느냐 죽음을 사느냐, 이것이 인생의 궁극적 질문이요 씨름이다. 겉으로 보면 생명을 사는 것과 죽음을 사는 것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생명을 사는 것과 죽음을 사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격차가 크다. 


  나는 생명을 사는 걸 ‘생명 살이’ 혹 ‘삶’이라 하고, 죽음을 사는 걸 ‘죽음 살이’ 혹 ‘생활’이라 하는데, ‘생명 살이’인 ‘삶’은 지위, 외모, 성격, 지식, 돈과 아무 상관이 없다. ‘삶’은 지위, 외모, 성격, 지식, 돈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삶’은 오직 앎(지식이 아님)과 이해와 사랑에서 나온다.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기 전까지는 단지 사는 것일 뿐 아직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제대로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제대로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으며,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삶’이라는 인생의 꽃봉오리가 피어난다. 특히 존재의 신비와 영광을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감사할 때 소담스레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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