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손바닥은 이미 문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잡고 있다기보단, 대기하는 느낌. 누르면 열리고, 열리면 맞닥뜨리게 되고… 그 당연한 사실이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하.”
호흡을 한 번 길게 뱉고, 손목을 살짝 힘줘 눌렀다. 그렇게, 내게로 들어오는 풍경.
조금 열린 창문, 환기하듯 들어오는 공기, 그리고, 아주 작은 기척. 눈이 적응하면서, 축사 안쪽 한 켠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그 한가운데, 연서가 있었다.
무릎을 굽히고 사료통을 정리 중인 연서가 보였다. 머리를 묶고, 체육복 바지 위의 풀과 흙도 털지도 않은 채, 그저 습관같은 동작으로 우리 안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말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했다. 옷깃을 스치는 먼지도, 발을 움직이면 날 소리도, 여기선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연서가 나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우린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연서의 눈동자는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늘 그 애가 가진 차분하고 평온한 표정 그대로였다. 내 표정은 어떤 모양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 불안한 틈에서 연서가 먼저 침묵을 깨주었다.
“왔어요.”
연서가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응.”
그리고 나는 그 한마디로는 부족해서 연이어 입을 열었다.
“…늦었다. 많이.”
하필 목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연서는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그 말은 용서도 위로도 아니었다. 그저 길었던 날들을 혼자 버티고 지나온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렸다.
“…미안해.”
몇 초가 흘렀다. 연서가 입을 열었다.
“축사 일, 조금 힘들었어요. 혼자여서.”
그런데도 연서는 웃었다. 빛 때문이어서일까, 살짝은 눈가가 젖어 보이는 듯했다.
연서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더니, 다시 사료통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더는 가만히만 서 있을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혼잣말 같기도, 들으라는 듯한 말 같기도 한 한마디였다. 망설임이 있었지만… 오래 얼어 있던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장갑… 여기 있었지?”
그렇게 돌아왔다. 두 사람이 같이 일하는 축사로.
그날, 둘이서 한 말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연서의 손과 내 손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계속 느껴졌다.
단 하나의 새로움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늘 익숙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익숙함이 내가 몰랐던 걸 알려주었다. 그리움은 별거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이곳에서 들었던 소리, 맡았던 냄새, 그리고 늘 여기 있던 여자아이까지… 비로소 지금 여기에 서고 나서야 알았다. 이 장소가 내 마음속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우리 반 히터 꺼도 되지? 입 건조해.”
“안 돼, 추워!”
“나는 땀 나려 하는데?”
하늘이 언제부턴가 하얘졌다는 걸 안 순간부턴 입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신발장의 운동화도 제법 두꺼워졌다. 11월은 그렇게 우리에게 겨울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오후 첫 수업을 마치고 난 쉬는 시간, 교실 뒤편의 서랍에서 다음 교시에 필요한 문제집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닫혀있던 뒷문이 스르륵 열렸다.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니 부반장이 두 손이 무겁게 종이 가방을 들고서 들어오고 있었다.
“이거 다 뭐야?” 다가온 한 친구의 물음에, 부반장은 자기 자리까지 오고서야 손을 풀면서 나지막이 한마디만 뗐다.
“3학년 교과서.”
“갑자기?”
의아해하는 친구에게 대답하는 부반장의 표정은 의외로 의기양양해 보였다.
“응, 동아리 선배한테 미리 받아왔지. 휴, 무거워 죽는 줄."
“와, 그걸 벌써 받았어?”
“어차피 이제 3학년 선배들 다 졸업하잖아. 너도 아는 선배 있으면 미리 받아놔.”
“음… 그럴까? 아, 그래야겠다!”
대화는 곧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그중 한 문장만은 오래 남았다. 졸업이 가까워진 선배들. 정말로, 11월이 되면서부턴 학교의 분위기가 사뭇 바뀌었다.
복도도, 급식실도, 운동장도 겉으로는 전과 같았지만, 3학년 선배들은 이미 다른 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졸업하고 나서 면허부터 따야지.”
“나는 자취할 건데.”
3학년 복도를 지날 때면 그런 말들이 들려왔다. 나는 그 옆을 그냥 지나쳤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