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15화

by 전석표

“아이고, 민재 덕분에 잘 먹었어.“

“이번에 큰 아빠가 보내주신 김치가 진짜 맛있는 거 같아, 할아버지.”

“난 더 먹고 싶은데… 형, 남은 밥 더 없나?”

“남은 거 따로 그릇에 담아놨잖아, 그거 먹던가.”


일요일 저녁, 할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김치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입 짧은 동생도 한 그릇 더 먹을 만큼 오늘따라 요리가 잘 됐다.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각자 일을 나눠 정리를 시작했고, 나는 베란다에 쌓여 있는 분리수거를 버리고 오기로 했다.


“여기서 좀만 더 서늘해지면, 딱 좋겠는데.”


분리수거를 얼른 마치고 1층 현관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나밖에 없던 공간으로, 멀리서 즐거운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조각 같은 웃음은 점점 가까워졌고, 이내 내 옆에 선 가족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젊은 부부, 그리고 그 가운데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였다.


“아빠도 너무 좋았다. 지은이랑 그런 데 많이 가봐야 하는데, 그치?”

“엄마는 빼고?”

“엄마도!”


아무 생각 없이 듣기만 했다. 막연히 기분 좋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이를 바라보자마자, 시선이 그대로 멈춰 섰다.


아이는 자기 몸만 한 새하얀 토끼 인형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토끼 인형의 코를 손가락으로 쿡 누르며 말했다.


“토끼들이 너무 좋아. 코도 동글고, 귀도 쫑긋하고… 그리고 따뜻해.”


엘리베이터 층수가 내려오는 소리만 또각또각 울렸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 인형만 보고 있었다. 괜히, 목 안이 뜨겁게 당겼다.


문이 열리며 가족이 먼저 타고 들어갔다. 나는 발을 여전히 바닥에 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찰나, 아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또 토끼 보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철컥, 하고 문이 닫혔다. 어떤 생각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방향만 또렷해졌다.


학교가 끝난 뒤. 가야 할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마음이 움직인 게 아니라, 이미 움직여 있었다.


“….”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아니, 사실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축사 앞에 도착했을 때, 숨이 먼저 멈췄다. 늘 대수롭지 않게 밀던 문 하나가 이토록 무겁게 보인 적은 없었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기까지 오래 걸렸고, 그 손을 누르기까지는 더 오래 걸렸다.


끼익. 문이 열렸다.

안은 어둑했고, 전등은 꺼져 있었다. 토끼 우리 쪽에서 들려오던 옅은 기척도 없었다. 사료 냄새만이 고요하게 남아있었다.


“…연서?”


말도 아니고, 그냥 새어 나온 호흡 같은 소리였다. 대답은 없었다. 어둠이 천천히 눈에 익어가자 축사 내부가 보였다.


정리된 우리, 물통, 걸레.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가, 가만히 멈춰 섰다.


여기서 더 들어간다면… 결국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늦었다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누굴 기다린 건지, 뭐라도 바란 건지, 내 스스로도 몰랐다.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결국, 문턱을 딛고 있던 발만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 한 발에 오래 걸렸다.


“내가… 늦었네.”


그 말을 하고 나자 비로소 발이 떨어졌다. 번쩍이는 결심 같은 건 없었다. 다만 확실히 알았다.


오늘 못 만났다고 해서, 끝난 건 아니라는 것. 다음번에 와야 한다는 것. 이런 건… 한 번에 되는 게 아니라는 것.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색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등 뒤에서 축사가 아주 조용히 멀어졌다.


다음 날, 무심코 복도 게시판의 달력을 멍하니 바라봤다.


거기서 가장 먼저 와닿은 건 수능 날짜가 아니었다. 축사에 가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문 앞에 있었다.


어떻게 왔는지는 흐릿했다. 확실한 건, 여기부터가 시작이라는 것뿐이었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