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우리는 후회되는 일이 있어도, 실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럼 오늘 하루, 아무것도 되감지 말고 살아볼래? 루프 없이 우리가 진짜로 뭘 느끼는지 그냥 그대로 겪어 보는 거야!”
나는 그녀와 한강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자친구가 생기면 꼭 같이 가보고 싶은 장소였다. 도착할 때쯤이면 노을 때문에 한강은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우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한강을 옆에 끼고 거닐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주로 다연이의 언니 이야기를 했다. 다연이 언니의 이름은 이소연이었다. 나중에 티브이에 나오면 기억해 두려고 물어보았다. 다연이는 어제도 언니를 위해 타임루프를 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매일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주제로 말을 걸지 몰랐다. 조금 긴장한 것 같다. 오늘 드디어 나의 서툼이 여실이 드러났다. 나는 가끔 스텝이 꼬여 그녀의 발을 밟기도 하고 다연이에게 오는 자전거를 피해 주려다가 한강으로 밀쳐내서 떨어 뜨릴 뻔도 했다. 다연이는 처음 보는 나의 실수가 웃기는지 깔깔거렸다. 이런 앤 줄 몰랐다며 박장대소를 했다. 나는 조금 창피했지만 그녀가 웃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새로웠다. 수백 번 반복했던 하루들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선명하고 뜨거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실수로 내뱉을 때에도 그녀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녀가 싫어하는 표정을 지을까 봐 걱정했던 지난날이 우스워질 정도였다. 나는 너무 행복했다. 반복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작은 설렘과 진짜 감정이었다.
“너 오늘 달라 보인다.”
다연이가 말했다. 그녀의 소감인가?
“어떻게 달라? 좋게 달라? 나쁘게 달라?”
“실수투성이에, 재미없는 농담에, 쩔쩔매는 행동인데 너의 표정은 진짜인데?”
“좋은 거야?”
“이제아 네가 날 진짜로 좋아하는 것 같아.”
“난 늘 네가 좋았는데.”
“지금 이 눈빛은 처음인걸.”
민망함에 눈꺼풀을 꿈벅거렸더니 그녀가 웃는다. 그래? 내 눈빛이 어떤데? 심장이 가슴 밖으로 나올 만큼 두근거렸다.
“다연아 그런데…. 내 기억엔 이 대사가 벌써 세 번째야.”
“어? 나 루프 안 썼어! 진짜야!”
“농담이야.”
“야!”
해가 마침내 떨어지고 다연이는 언니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해야 한다며 집으로 서둘렀다. 나는 다연이를 집으로 데려다주면서도 긴장했고 떨리고 신이 났다. 다연이와 헤어지고 나서도 설렘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나에게 부족했던 건 아마도 자신감이었을까. 완벽해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그것보다 진심을 전했어야 했나 보다.
“어이, 송재윤! 요즘 재밌어 보인다.”
장난스럽게 비아냥 거리는 승학이 목소리가 등 뒤에서 꽂혔다. 나는 이를 악 물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는 피던 담배를 던져 즈려밟고는 건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위협적이지만 그래도 난 쫄지 않았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다연이랑 좋아 보인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너 같은 애랑 안 어울리지 않나? 걔는 소녀 가장이야. 너처럼 고귀하신 분은 이수아랑 사귀어야지.”
“늦었는데 집에나 가라.”
승학이 뒤로 서 있는 깡패새끼 같은 애들이 슬금슬금 나와 자리를 떠나려는 나를 막아섰다. 그 아이들이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하자 나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어깨를 털어냈다. 그들은 양손을 얼굴 옆에 펴 보이며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딱 거렸다.
“그런데 걔는 소연이 누나 없이 혼자서 잘 지내나?”
“네가 소연이 누나를 알아?”
기분이 확 나빠졌다. 너 따위가 왜 소연누나를 아는 걸까. 아니 그보다 너는 나보다 뭔가를 더 많이 안다는 우월감에 나를 하대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데
“알지 유명하지 우리 학교 엄청 예쁜 선배잖아. 아이돌 연습생이고.”
“….”
“그 누나 몇 달 전에 죽었잖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