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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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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주 Feb 15. 2023

겨울을 나기 위한 것들


파주의 겨울은 참 길고 깊다. 몇 년을 살아도 적응이 안 되는 추위다. 겨울만 되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봄이 오기만을, 그래서 얼른 여름이 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악어식당을 열고 두 번째 맞는 겨울에 뜻 밖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이 날씨에 밖에 돌아다니면 큰일 난다고 미쳤냐고 하던 나인데... 콧구멍에 고드름이 열릴 것 같은 시린 공기를 쏘이며 걸을 때의 요상한 상쾌함을 알고 말았다. 이게 겨울 냄새였구나.


일년 내내 여름을 꿈꾼다고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나로서는 굉장한 발견이었다.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린 뒤 마시는 시원한 맥주를 통해 주로 행복을 확인해왔기에 겨울엔 그런 즐거움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작열하는 태양빛과 푸른 물, 낙천적인 사람들이 있는 곳에 살 때 가장 행복했다고, 언젠가 더 나이가 들면 그곳으로 돌아갈 거라고 늘 이야기했으니까. 이 소망이야 여전하지만 겨울을 단지 견뎌야 하는 대상으로 여길 때보다 조금 덜 움츠러들고 더 재미있어졌다.





수프 끓이는 걸 원래부터 좋아했다. 오래 전 작은 자취방에 살 때 부터 종종 수프나 카레를 끓이면서 근심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니까 식당을 연다면 수프를 메뉴로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멕시코에서도 같이 생활하며 일하던 크루들이 시름시름 앓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따끈한 수프를 냄비 가득 끓여 나눠 먹곤 했다. 베토벤이 그랬댔나, 영혼이 순수한 사람만이 맛있는 수프를 끓일 수 있다고? 그건 모르겠지만 수프를 끓여 먹으면 지친 영혼도 달래주는 건 맞는 것 같다. 좋아하는 나무주걱을 한 손에 딱 들고 알록달록 채소들로 향긋한 채수를 우려내고, 좋은 기름에 재료를 볶고 끓이고 젓는 과정은 그 자체로 치유다. 뜨끈하고 고소한 수프를 호호 불어 먹을 때, 겨울이어서 더 맛있다는 느낌은 이제야 알았지만 말이다.



또 다른 겨울의 기쁨은 해산물이 아닐까 한다. 물고기들이 차가워진 바닷물에 사느라 지방을 찌워 더 고소한 맛이 난다고 쓰다 보니 물고기에 갑자기 인격이 부여된 듯해 왠지 미안해지지만 겨울 방어를 앞에 두고는 아무 생각이 들 수 없다. 연남동의 바다회사랑이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매년 그곳에서 대방어를 먹었지만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매년 방황하다 올해 처음 제주 직송을 주문해 집에서 썰어보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고 특히 주문처의 설명대로 하루 숙성해 다음날 먹은 게 더 맛있었다. 주문했던 곳은 <제주보물섬>이란 곳.(내돈내산) 다년간 최애 와인으로 꼽던 피노누아를 제치고 작년 여름 소비뇽블랑이 최애 자리에 등극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소 닫혀있던 화이트와인을 향한 마음이 꿈틀꿈틀 열리더니 샤도네이, 슈냉블랑, 드라이 리슬링, 비오니에, 샤블리 등 올 겨울 참 다양한 화이트와 함께 보냈다. 이제는 레드와인보다 화이트와인이 더 자주 당긴다. 생각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와인 없는 겨울은 생각할 수 없다. 입맛의 방향은 결국 산도를 향해 가는 것일까. 신 커피 보다 구수한 커피를 좋아했는데 요즘은 커피의 산미가 점점 좋아져 큰일이다.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 아무것도 단언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이번 겨울은 유독 이웃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차 안 타고 걸어서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일상에 큰 즐거움이다. 성인이 되고 학교나 직장이 아닌 곳에서 진짜 마음이 가는 친구들을 만나는 게 가능하다니. 야당동이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주로 갑자기 모이지만 모였다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쏟아진다. 평범하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희한하게 모였는데 살면서 경험한 것들과 가치관이 얼추 비슷하다보니 주제가 무엇이든 진짜 재밌게 대화가 오고 간다. 우리가 김장을 한 건 아니지만 얻어온 김장김치에 수육 삶고 생굴 얹어 화이트와인도 먹고 막걸리도 먹은 밤. 이것이 겨울의 백미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참, 대게도 한 박스 주문해 다같이 쪄 먹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 같이 먹을 이웃이 있는 삶이라니. 더 바랄 것이 없는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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