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일기 1화: 내가 '아직도' 우울증이라고요?

(자칭) 우울증 마스터인 내가 그럴 리 없어..

by 당근

MMPI와 정식 MBTI 검사를 신청했던 나는, 검사 며칠 뒤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보고서와 대면 해석 중에, 대면 해석이 좋을 것 같아 그걸로 선택했다.

그리곤 면담 당일, '아싸~ 성격 검사 해석 듣는 건가 ㅎㅎ 재밌겠다~'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상담실에 입장했다.


그렇지만, 나와 달리 상담사님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고, 곧이어 말해주시는 내용은 좀 더 무거웠다.

정신 건강 척도는 B-에, 안정형 우울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위험한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심리적 위기 상황’에 필적한다고 했다.


추가로, MBTI 검사는 우선 'ISFP'에 가까워 보이지만, F가 1점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검사를 실시한 당일, 직장에서 조금 힘든 일이 있어 '이제부턴 감정 안 쓴다!'라고 다짐을 하긴 했다.

그렇다고 F인 내가 1점밖에 안 나오다니..? 너무 다짐이 과했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자리 잡은 내 방어기제의 영향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복선이란 걸 모른 채 그저 별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정신 건강 척도가 겨우 ‘B-’라고? 내가, 우울증이라니? 아직도..? 난 분명 괜찮게 살고 있었는데?‘


[ 내가 또다시 우울증 일리가 없어 ]


이때부터 긴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선 ’ 아닌데.. 그럴 리 없어.. 나는 괜찮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주변에서도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내가 힘들다고? 그럴 리 없어 ‘라는 생각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어깨엔 괜히 힘이 들어갔고, 점점 상담사님의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졌다.

그전까지는 자연스러웠을 내 표정도, 괜스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담사님이 이번 주의 감정을 ’상, 중, 하‘로 표현해 보라고 했다.

나는 ’하‘를 택했고, 스트레스 수준은 ’상‘이라 답했다.

당시 직장에서 여러 이벤트가 있어 상당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 이번 주만 그런 거지 다른 날에는 ‘중’ 정도일 텐데..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닌가 ‘ 라며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화를 지속할수록 상담사님은 나의 감정과 힘듦을 꺼내어 말해보기를 유도하셨다.


나는 더더욱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인정하기가 싫었다.

나는 괜찮아야 하는데, 멀쩡한 인간이어야 하는데, 죽을 만큼 힘들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내 입으로 ’ 저는 힘들고 연약해요 ‘라고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는 나는, 그 수년간의 고통을 겪고 정신적으로 성장한 ’ 멋있는 인간‘ 이어야만 했다.


이렇게 내 생각과, 상담사님의 의도가 다르다고 느껴질수록 나는 점차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상담사님의 말에 반박을 하거나 불편함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덤덤하게 반응할 여유가 점차 바닥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웃기지 않아도 피식거리며 "괜찮아요.." "제가요?" "아.." 하며 말끝을 흐리며 답을 회피하기 시작했고, 점차 남의 일을 말하듯 감정이 둔감해 보이는 말투를 쓰기 시작했다.

상담사님이 내가 감정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라고 여러 차례 설명해 주셨지만, 인정을 해버리면 내 안의 무언가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에 버티기 시작했다.


상담사님이 감정 표현을 해보라는 의미에서 ’ 저는 지금 많이 힘들어요 ‘라는 말을 따라 해보라고 했다.

이미 감정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진심으로 말해버리면 내 안에서 뭔가 터질 것만 같았다.

최대한 덤덤하게 따라서 말을 하자, 상담사님이 물었다.


"본인이 지금 어떤 말투로 말했는지 알고 있어요?"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제가 남의 일처럼 말했나요..?" 하고 하하 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진심을 피할수록 머릿속은 점점 멍해지기 시작했고, 상담사님과 눈을 더 역동적으로 안 마주치려 벽을 쳐다보면서 얘기하기도 했다.

마치 내 안에서 위기일발 신호가 켜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뭔가가, 들키기 일보 직전! 참아내야 한다! 하는 상태였다.


방심한 채로 호기롭게 상담실에 들어갔다가, '팩트 폭격'을 맞고 어질어질해진 나.

황급히 회피형 실드를 꺼냈지만, 그마저도 베테랑 상담사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나의 회피와 상담사님의 직면시키기 핑퐁, 심리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높은 확률로 내가 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