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당신에게

by 유칼리

언젠가부터 내가 숨기고 싶은 것일수록 꼭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픈 사실은 감출수록 점점 안으로부터 썩어 결국은 곪아터진다. 스스로에 대해 어쩌면 강박적 일정도로 솔직해야 한다고 결심했던 건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미지가 가장 중요했던(속이야 썩어 문드러지든 어쨌든 간에) 엄마에 대한 강한 반감에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드러낸다는 것. 나를 온전히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니, 고통스럽다는 말로는 충분치가 않다. 두렵고, 역설적으로 내가 아는(안다고 믿었던)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이런 이유로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피해 오랜 세월을 도망 다녔다. 곪아터진 상처를 이리저리 덮어보다가 이제 더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주변에 커밍아웃했다. 또 도망갈 수 없도록 스스로 퇴로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마치 운동해야지 하는 결심만으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헬스장을 등록하고, 동네방네 살 뺄 거라고 광고했던 것처럼.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드러낸 직후 만난 현실은 놀라웠다. 예상했던 것처럼 세상이 뒤집힐만한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치지는 않았다. 그보다 놀라웠던 것은 내가 수렁에 빠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나만' 수렁에 빠진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그곳에 있었다.




내 상태를 인정하고, 병원에 가고,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 돌아온 것은 위로와 지지, 응원이 아니었다. 나는 모두의 커밍아웃을 마주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 서서 절망 속으로 떨어진 칠흑 같던 그 순간,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분신 같은 아이가 세상을 떠난 순간, 모든 노력과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긴 터널을 걷던 순간,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그 모든 순간으로 가서 '그들을' 만났다. 내가 암흑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곳에 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내가 약을 한 알 삼키는 그 순간, 저편 어딘가에 그들도 비슷하게 생긴 것을 물과 함께 꿀꺽 삼킨다.

어둠이 몰려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좌절감과 죄책감에 휩싸일 때, 그들도 어둠을 덮고 소리 없이 울고 있다.

몽롱한 밤을 지나 잠을 깨고 또다시 심장이 두근대던 그 순간, 전기자극(ECT)으로 뇌를 깨우는 그들이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절벽 끝에서 모래를 움켜쥐고 있는 그들이 있다.

동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나를 복기할 때, 그들은 대학병원 대기실에서 그 시간을 견디고 있다.


드러낸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보이지 않던 고통으로 연결된 수많은 나와 그들을 만날 수 있다. 드러낸다는 것은 공포스럽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동시에 나에 대해 애정을 가질 수 있는 길이다. 나는 지금 내가 놓친 수많은 기회와 망가뜨린 순간들 끝에 생애 가장 큰 기회를 만났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껍데기 안을 들여다볼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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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시즌 3이 공개되었다. 그들과 함께 드러난 라틴어 문구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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