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가 조심스럽게 내 상태를 물어왔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수챗구멍 위에 늘어진 슬라임 같아.
수챗구멍 거름망 사이마다 길게 늘어져 끼어 있는 무거운 슬라임.
우울증은 관계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시작해 내 존재와 인생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가족 간의 일이 늘 그렇듯이 관계들은 덩어리 져 어디서부터 얽힌 건지 알기가 힘들다. 이 덩어리에서 어느 부분이, 어떤 형체를 띤 것이 나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게.. 결국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 됐다.
나는 왜 사는가. 엄마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기 위해서. 그러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일까.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가. 왜 나는 인정에 목말라하는가. 엄마의 말처럼 인내심이 없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참고 있는가.
어디엔가 교묘하게 치워뒀던 질문들이 쏟아지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를 가리고 둘러싸고 있던 것들을 치우고 보니 거기엔 내가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인지, 어떤 게 너인지, 어디까지가 나를 뺀 세상인 것인지. 나를 그리고 있는 선과 경계를 찾을 수가 없다. 형체가 명확하지 않은 흐물한 슬라임 같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구멍에 걸쳐져 있는 슬라임.
수챗구멍 아래에는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존재한다. 나는 거름망의 구멍마다 늘어져 있는 투명한 슬라임이다. 구멍아래로 순식간에 흘러가지도, 구멍 위로 굴러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다. 가까스로 거름망 구멍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한스처럼 수레바퀴에 항복할 것인가. 하지만 헤세도 정신병원에서 살아남았다.
오늘도 수챗구멍 위에 버티고 남아있다. 아직 흘러갈 수가 없다. 내가 무엇으로 흘러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