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다.
방학식 날 희진은 할머니와 함께 학교에 가서 방학 중 숙제 안내문, 2학기 교과서, 그리고 방학 때마다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문제풀이를 하게 되어있는 <방학생활>을 받아왔다.
오랜만에 반 친구들의 얼굴을 보기가 창피해서 일부러 학생들이 거의 다 학교에서 빠져나갈 시간에 맞춰 교무실로 갔다.
수두가 나은 자리는 얼굴 곳곳에 파인 흉터를 만들어 놓았고 볼살이 쑥 빠진 얼굴은 난민촌에 사는 아이의 몰골 같아서 도저히 아는 사람들 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희진에게 엄마는 잘 계시냐고 물었다.
"네..."
"엄마한테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주시라고 해야겠다. 잘 먹고 살 좀 쪄야겠어, 허허허..."
"......"
"희진이가 엄마를 닮아서 이렇게 이쁘고 얌전하구나?"
'그럴 리가요, 그 여자랑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희진은 제발 그 여자 얘기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선생님은 할머니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할머님, 희진이가 전학 오자마자 적응도 금방 하고 공부도 잘했어요. 수업을 많이 빠졌는데도 기말고사도 잘 봤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지요."
'아니, 내가 시험을 잘 봤다니까요!'
'어른들은 왜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걸까...'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교문을 나서며 통지표를 열어 보았다.
전 과목 "수"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공부를 해 본 적도 없었고 시험 기간이라고 해서 집에서 문제집 한 번 풀어본 일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늘 한두 과목 "우"에 나머지는 모두 "수"를 받았었는데...
이번엔 "우"가 2개, "미"도 1개가 있었다.
"쳇... 이거 누구한테 말하면 안 돼, 할머니!"
"오메, "미"가 다 있다냐?"
"안 배운 거라 몰랐다고! 아파서 그런 거잖아!"
"하긴 그랬재. 그래도 잘했다, 이만 하믄..."
"많이 잘한 거라니까요! 안 배운 게 얼마나 많이 나왔는데."
"그래, 니가 니 아빠 닮아서 머리가 좋긴 허지. 나도 옛날에 얼마나 똑똑하다는 소릴 들었는 줄 아냐..."
집으로 가는 내내 그렇게 할머니와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희진의 머릿속엔 통지표에 적힌 "미"라는 글자가 계속 박혀 떠나지 않았다.
며칠 후, 할머니가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오셨다.
흰털에 드문드문 까만 털이 얼룩무늬처럼 박힌 바둑이였다.
이제 막 어미젖을 뗀 새끼였는데, 강아지를 보자마자 희진은 그 여자, 미선이 떠올랐다.
"담양댁 닮았어. 눈이 크고 톡 튀어나온 게, 그치 할머니?"
"참말로 그런다이! 영락없이 담양댁이구만..."
희진은 작은 강아지가 그 여자를 닮았다는 이유로 별로 정이 가지는 않았으나 강아지는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희진이만 졸졸 따라다녔다.
"할머니, 강아지 이름을 뭘로 해?"
"바둑이라고 부르자."
"에이, 촌스럽게... 왜 얼룩무늬 개는 다 바둑이야? 누렁이, 흰둥이, 검둥이... 다 털 색깔로 대충 불렀잖아. 이번엔 싫어."
"부르기 쉽고 좋기만 허다, 안 그러냐, 바둑아?"
"아이참, 안 이쁘다니깐!"
희진은 얼굴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두 손 안에서 바둥거리는 강아지를 조몰락거렸다.
"아, 뽀삐! 뽀삐라고 할래."
"바둑이가 더 정답고 좋다. 그 이름은 요상한디..."
"아니, 딱 어울려. 생긴 거랑 딱 느낌이 맞다고. 뾰족한 주둥이에 튀어나온 눈, 작고 통통 튀는 몸짓... 헤헤 뽀삐야, 그치?"
TV 광고에서 나오는 뽀삐, "우리 집 화장지 뽀삐, 월월..." 노래에 맞춰 폴짝거리는 뽀삐와 닮은 강아지의 이름으로 제격이었다.
뽀삐는 하루종일 희진을 쫓아다녔다.
밤이면 마당 한 구석에 있는 개집에 들어가지 않고 마루 밑에서 희진의 운동화를 깔고 앉아 구슬피 울었다.
"깨갱깨갱 깨개갱..."
"끼이잉 끄으응 끄으응..."
희진은 이부자리에서 나와 마루밑에서 강아지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짧고 가는 꼬리를 바삐 흔들며 뽀삐는 몸을 비벼댔다.
"아야, 자꾸 손대믄 개가 안 큰당께. 언능 들어와!"
방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호통에 뽀삐를 내려놓고 들어갔다. 다시 뽀삐의 낑낑거림이 구슬프게 시작됐다.
생각 같아서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자고 싶지만 할머니와 한 방을 쓰는 희진으로선 언감생심이다.
강아지의 울음소리가 커지면 마루로 나가 강아지를 안고 달랜 후에 다시 이부자리로 들어가기를 몇 차례. 첨엔 야단을 치시던 할머니가 잠이 들어 코 고는 소리가 들리자 희진은 마음 놓고 뽀삐를 보러 나갔다.
몇 번을 그러다 밤이 깊어지고 잠에 취한 희진이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않자 뽀삐의 울음소리도 점점 작아지더니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밤을 보내자 뽀삐는 밤이 되어도 울지 않고 제 집에서 잠을 잤다.
오전에 방학숙제를 하고 그림일기를 그리고 나서 심심해질 무렵이면, 같은 골목에 사는 옆 반 친구인 영란이가 놀러 왔다. 둘은 마루에 앉아 책상다리로 앉은 다리 위에 뽀삐를 올려두고 오목을 두거나 카드놀이를 했다. 영란은 뽀삐가 작아서 인형처럼 예쁘다고 했다.
가끔 미선에게서 전화가 왔고 딱히 할 얘기가 없던 희진은 뽀삐 이야기를 해주었다. 강아지의 얼굴을 볼 때마다 미선이 떠오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뽀삐는 무럭무럭 자라지 않았다.
처음 데려왔을 땐 젖살 때문인지 포동포동해 보였지만, 다른 강아지들처럼 자고 일어나면 조금 더 자라 있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오히려 살이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문방구 가게 앞에서 사 온 병아리처럼 어딘가 약해 보였다.
어느 날 희진은 뽀삐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앞머리 쪽에서 상처를 발견했다. 팥알 절반 크기 정도의 상처는 뒷발로 긁은 듯했고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뽀삐는 수시로 머리의 상처를 발로 긁었고 피딱지가 떨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희진은 빨간 소독약을 바르고 항생제 연고를 덧발라주었다.
뽀삐의 상처는 낫지 않았고 점점 커졌으며 주변의 털까지 빠지기 시작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뽀삐는 걸음걸이가 이상해졌다. 한쪽으로 비스듬히 비틀거리며 걸었고 뛰려다가 고꾸라졌다.
희진은 열심히 약국에서 항생제를 사다 먹이고 매일 상처 부위에 빨간 소독약과 연고를 바른 후 거즈를 새로 붙여줬다.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비틀거리며 걸으면서도 희진이만 보면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옆에 와 꼭 붙어 있으려는 뽀삐.
희진은 뽀삐가 점점 귀찮고 싫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