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 리브로 Oct 20. 2023

희원의 편지

그 여자 김미선 13

학교에서 돌아온 희진은 우편함에 들어있는 편지를 꺼냈다. 수신자는 아빠였고 보내는 사람은 여동생 희원이었다.

희원이 엄마와 함께 대전으로 가버린 후 그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지만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섯 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희원이 태어난 후 두 번 보았, 희진은 계속 할머니와 살았다. 3학년에 올라갈 즈음부터 모두 모여 함께 살았지만 5학년이 되자 이사를 오고 전학을 한 후  엄마는 희원을 데리고 엄마의 친정 형제들이 있는 대전으로 떠났다.

이유도 모른 체 "할머니랑 잘 지내라"는 한 마디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 말을 하면서 엄마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있었던 것도 같다.

아무튼 희진이 엄마와 희원을 생각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고 어쩌다 생각이 나더라도 보고 싶다는 감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언젠가 희진은 아빠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이제 난 외동딸이야?"

"그건 아니지. 희원이가 있으니까..."

아빠의 대답에 희진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실망하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TV 드라마에서 보면 외동딸은 특별해 보이고  더 지극한 사랑을 받는 것 같아서 은근히 멋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따로  미선과 살림을 차렸고 지금은 비어있는 고모네 집에서 살고 있다.


'희원이가 글씨를 이렇게 잘 쓴다고?'

희진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고 동화책 한 권 가져본 일이 없었다.

희원은 세 살 무렵부터 그림책과 동화책 전집을 가지고 놀았다. 함께 살았을 때 희원은 희진의 국어 교과서를 줄줄 외웠다.

연필로 꼭꼭 눌러쓴, 1학년 희원의 글씨체를 낯설게 느끼며 희진은 봉투를 조심히 열었다. 몇 달 동안 전화 한 통 없었고 연락처를 알지도 못했던 동생의 안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빠, 안녕하세요? 저는 둘째 딸 희원이예요..."

가끔 받침 글자가 틀리긴 했지만 제법 어른스러운 말투의 긴 문장이 빼곡한 편지였다.

희원이 OO국민학교에 다닌다는 이야기, 엄마가 가게를 얻어서 분식집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외삼촌네 가족과 가까이서 산다는 내용과 마지막엔 돈을 보내달라며 은행의 계좌번호도 적어놨다. "온라인으로 보내주세요."라는 문구를 보며 희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라인? 그게 뭐지?'


학교에서는 매 월 정해진 '저축의 날'에 모든 학생들이 저금할 돈을 가져오도록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 동전 몇 개씩을 가져갔고 어쩌다 오백 원짜리 지폐를 가져가는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개인 통장에 금액을 일일이 적고 모아진 돈을 커다란 종이봉투에 담아 학급의 저축부장에게 다.

통장과 돈을 학교 앞 마을금고에 보내면 통장의 입금액이 적힌 칸의 숫자 옆에 마을금고의 직원이 확인 도장을 찍어서 학교로 통장을 보내줬다.  저축의 날에 깜박 잊고 돈을 가져가지 않은 아이들은 손바닥에 매를 맞기도 했고 친구에게 십 원짜리 동전 몇 개를 빌려서 내기도 했다.


희진은 편지 봉투를 다시 풀로 조심히 붙여놨다가 며칠 후 방문한 아빠에게 건넸다. '온라인'이 무슨 말인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빠, 빨리 읽어봐, 희원이가 뭐라고 썼는지 궁금해."

"나중에."

"왜? 지금 읽으면 안 돼? 나도 읽고 싶은데!"

"나중에, 읽고 나서 이야기해 줄게."


희진 아빠는 거의 매일 퇴근 후 저녁시간에 희진을 보러 집에 들렀다. 주로 저녁밥을 먹고 나서 TV를 보고 있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는 시간이었는데 항상 대문간에서부터 "진아" 하고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마당에 들어섰다.

매번 희진은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마루로 뛰어나갔다.

아빠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희진의 학교생활에 대해 물었다.  희진이 전 과목의 내용 요약과 학습문제가 들어있는 <표준전과>를 꾸준히 풀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어느 날  TV 드라마에 열중하고 있던 희진의 귀에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할머니가 말하는 내용이 들려왔다. 할머니는 누군가와 전화 통화 중이었다.

"세상에,.. 글쎄 벽장에 칼을 숨겨놨다고 하더라..."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희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쳐다봤고 할머니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어, 그래. 끊고 다음에 얘기하자."

 "할머니, 누구야?"

"어? 으,.. 그... 너네 고모다."

"누가 칼을 숨겨놨다고?"

"아니, 아무것도 아녀."

"아까 얘기하는 거 다 들었는데? 누가 어디다 숨겨놨다는 거야?"

"너는 몰라도 돼. 어떤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여."

"누구 이야긴데?"

"너는 모르는 사람 있어. 신경 쓰지 말랑께 그런다."


며칠 후 미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희진아, 잘 지내니?"

"네..."

"혹시 동생이랑 엄마랑 연락하고 있어?"

"아뇨."

"전화나 편지 안 왔어?"

"안 왔어요."

아빠에게 온 희원의 편지가 생각났지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안 궁금하니?"

"별로요..."

"그래? 너 정말 냉정하구나!"

"......"

희진은 미선의 전화가 싫었다. 저음의 음울한 목소리와  재미없이야기...

얼른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에 단답형의 대답만 했고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잘 있어. 다음에 만나자."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마음속에선 "싫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빠와 할머니의 대화를 들은 희진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얼마나 됐다냐? 입덧이 심하다고?"

"잘 못 먹어요. 드러누워만 있고..."


꿈속에서 미선은 불룩 솟아오른 배를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어루만지며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동생이야. 기쁘지 않니?"

"......"

" 넌 정말 냉정한 애구나!"

미선이 눈을 흘기며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자 엄마의 얼굴이 나타났다.


잠에서 깬 희진은 울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용의 검사(체육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