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여자가 무섭다"라고 하신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지난 세월 동안 모든 부당함을 참고 참고 또 참으며 얼마나 마음속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던가...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지도 모를 그런 원망의 마음이 내 안에 가득했었다. 유난히 힘들었던 몇 년 동안 의지했던 스님의 강연 영상 덕분에, 내 안의 화를 들여다보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다고 바로 평온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유튜브 채널을 통해 알게 된 어느 신부님은 "여자가 50 넘으면 여자다운 여자가 없다. 깡패가 된다. 호르몬 때문이다."라고 얘기했다.
청중들이 모두 웃고 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여자다운 게 뭔데? 아니, 나보다 겨우 대여섯 살 많은 신부님이 꼰대스러운 사고의 소유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발끈하는 나.
머릿속에선 여자다움 vs 남자다움, 잰더갈등의 이슈가 떠오르면서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따지려 드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이가 들면서 여자는 에스트로겐이 감소하여 상대적으로 남성호르몬의 역할이 부각되는 것이라는 걸 말한 것뿐인데, 그걸 알면서도 단어 하나에 꽂혀서 따지고 드는 내면의 모습이다. 이러니 깡패라고 하지...
하루가 지나고 나니 어제의 일을 감정의 동요 없이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역시 시간은 약이고 이놈의 성질머리는 못돼먹은 게 분명하다. 조금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닐 수 있는데 자극에 대한 반응이 즉각 일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겉으로는 소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속에서는 천불이 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어제 입주민들의 오픈 채팅방에서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는 개념 없는 이웃에 대한 얘기가 오가는 걸 읽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에 어느 주민이 올린 장문의 글에 잠시 멈칫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발머리에 개 두 마리 데리고 다니며 주황색 똥봉투를 버린 아줌마, 며칠 지켜봤는데 오늘 또 그러더라는, 치우라는 것이었다.
응? 뭔가 익숙한데? 혹시... 나??
다시 문장을 읽어봐도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단발머리, 개 두 마리, 주황색...
순간 심장이 벌렁거리며 관자놀이에서도 심장의 펌프질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지?
나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든 오픈 채팅방의 글
장문의 글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나를 말하는 것 같은데 배변봉투를 음식물 수거함 옆에 있는 쓰레기봉투에 넣고 있으며 경비원이 그곳에 넣으라고 했었다고. 아무 데나 투기한 것이 아니라고...
내가 아직 문장을 전송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댓글이 올라왔다. 개념 없는 사람들이라느니, 쓰레기봉투에 얼마나 자리 차지한다고 그런 행동하느냐며...
나의 감정은 이제 분노의 단계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쌈닭처럼 달려들고 싶었다.
그러나 심호흡을 하며 조곤조곤 ( 사실은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봉투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변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이웃을 만나면 불쾌감을 줄 수 있고 냄새가 안에 남는다...
그랬더니 나중에 댓글을 올린 사람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자기는 배변봉투를 밖에 투척하는 사람에게 한 말이라고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댓글 중간중간에 다른 글에 대한 댓글이 섞이기도 하니 어느 글에 대한 답장인지 지정해주지 않으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특정한 것 같은 글을 쓴 사람은 댓글을 더 올리지 않고 조용했다. 뭔가 더 반박하거나 변명할 기회가 없어져 버린, 말하자면 싸울 준비는 되어있는데 싸울 대상이 없어져버린 것 같은 묘한 상황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워워. 진정해. 진정하라고.
마음이 계속 요동쳤다. 온 세상에 내가 개똥이 든 주황색 배변봉투를 아무 데나 던지고 다니는,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단발머리 아줌마라고 얼굴이 알려진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나를 비난하는 그 문장들이 잊히지 않고 계속 생각났다.
다시 채팅방의 대화창을 확인했다.
어, 그런데... 다시 보니 "단발머리파마"라고?
내 머리 스타일이 단발이고 곱슬기가 있어서 구불거리긴 하지만 파마머리라고 할 만큼인가?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주민은 여러 명이다.
주황색 봉투? 그것도 나만 쓰는 건가? 같은 디자인의 배변봉투를 색깔별로 가지고 있고 최근에 주황색을 사용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 것을 여러 차례 봤었다.
쓰레기통엔 같은 배변봉투가 색깔별로 버려져 있다.
내가 무슨 탐정도 아니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말한 건데 내가 "저요!" 하고 손 든 것인가? 그것도 동호수가 닉네임으로 공개되어 있는 채팅방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화는 점차 가라앉았으나 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밤늦게 퇴근한 남편은 말했다.
"당신 아니구만. 파마머리 아니잖아."
"아니, 그래도 그 사람은 파마머리라고 인식했을 수 있지. 직모는 아니고 구불거리긴 하니까..."
"당신 아니라니까. 아닌데 괜히 흥분했구만!"
"아니거나 말거나 단발머리, 개 두 마리, 주황색봉투 말하니까 딱 내 모습이잖아. 그리고 주워서 들고 가라느니 더 이상 버리지 말라느니 명령조로 말하는 게 기분 나쁘지!"
"아무 데나 버린 사람한테 말한 거겠지."
"그랬다면 내가 쓰레기봉투 안에 넣고 있다고 말했을 때, 다른 사람을 얘기한 거라고 말했겠지. 왜 가만히 있겠어? 그 사람은 그냥 개똥봉투가 자기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
"뭐 그럴라고... 당신을 말한 게 아닌데 뭐라고 하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아니, 왜 가만히 있냐고? 다른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주면 되지. 나만 이상한 사람 되잖아!"
하여간 저 남자는 내 편 아니고 남의 편이 맞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함에 버릴 때 비닐봉지에 담아 가서 버리고 그 비닐을 수거함 옆에 놓인 관급쓰레기봉투에 버린다.
오물이 묻은 비닐을 잘 오므려서 버리는 사람이 드물고 대부분은 음식물 썩은 물이 줄줄 흐르는 상태로 아무렇게나 던져놓아서 비닐들이 쓰레기봉투 안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고 밖으로 넘치게 된다.
최대한 쓰레기봉지의 안쪽으로 배변봉투를 넣으려고 하지만 가끔은 쌓인 비닐 위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그럴 땐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묶어서 버린 개똥보다는 악취가 진동하는 물이 줄줄 흐르고 썩은 음식물 찌꺼기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비닐이 더 더럽게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그건 내 관점이고,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개똥만큼 혐오스러운 것이 없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어제는 욱하고 올라왔던 화를 진정시키기 힘들었고 비록 내 속은 쌈닭처럼 전투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밖으로 드러낸 것은 정중한 문장이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어제의 채팅방 문자를 확인해 봤다. 불쾌해서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글들을...
그런데, 엥? 이건 뭐지?
내가 배변봉투를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 옆의 쓰레기봉투에 잘 넣고 있다고 쓴 답글 바로 아래에 처음 비난의 글을 썼던 사람이 댓글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걸 왜 어제는 못 봤지?)
내용은 헬스장 앞에서부터 바닥 여기저기에 던져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 글을 못 보고 다시 댓글을 올리기는 했으나 공개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들끓고 있는 마음과는 달리 상대방을 자극할 만한 표현을 쓰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순간 욱해서 쓴 댓글과 내가 놓쳤던 처음 글쓴이의 대댓글
결과적으로 처음 비난의 대상과 내가 동일 인물이 아님이 밝혀진 셈이긴 하나 인상착의 때문에 나라고 생각하고 손들고 나선 꼴이 되어서 우스워지긴 했다.
그러나 처음 글을 쓴 사람은 실제로 나를 보고 화가 나서 글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몇 번 땅바닥에서 뒹구는 주황색 배변봉투를 보고 (한 번도 내 눈엔 띄지 않았던 것이 이상하지만, 누군가 치웠겠지)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내가 주황색 봉투를 들고 산책 중인 것을 보고는 동일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실제로 나 아닌 다른 단발파마머리의 여자가 투기하는 모습을 보고 글을 썼는데 엉뚱하게도 내가 나서서 "나는 아닌데요"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이 무엇이든 설왕설래하고 있는 문자 폭탄에 피로감을 느꼈을 대다수의 입주민들은 나의 인상착의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곧 잊어버릴 것이다. 글을 올린 사람도 '내가 오해했었나 보다' 하거나 '내가 본 아줌마는 아닌데 이 아줌마는 왜 열을 올리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남들은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을 문제인데 나 혼자서 속에서 화가 끓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남들의 시선을 그만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기 싫다는 생각, 사람들이 나를 상식적이고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아무도 나를 욕해서는 안되고 오해해서도 안된다는 생각...
앞으로도 누군가 나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화가 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며 그 사람을 설득하려고 애쓸 것이다.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처럼, 어제 나는 두 번째 글을 발견하지 못하고 내 얘기만 하기에 급급했다.
그 글을 봤다면 적어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도 못 봐준다고?'라며 오후 내내 속으로 씩씩댈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겉은 멀쩡한데 속에선 화가 들끓고 있는 조용한 여자, 마음속에 길길이 날뛰는 깡패가 들어앉아 있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