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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Mar 04. 2024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

우리 동네 흰둥이 15

2월의 셋째 주말 오후,

아파트의 정문으로 나와서 후문 지하 주차장 쪽 도로로 가는 중이었다.

2차선 도로의 경사진 커브길의  반대편 차로에서 흰 개가 어슬렁거리다가 고개를 들고 내 차를 쳐다보았다.

늘 그랬듯 그 개를 가까이서 확인하려고 차창문을 내렸다.

보통은 차가 가까이 가면 움찔하며  경계를 하고 다른 곳으로 피해버리는데 그 개는 길을 건너서 천천히 내쪽으로 다가왔다.

좁은 도로라서 다른 차량이 지나가면 위험해질 수 있기에 그 구간을 피하려고 차를 멈추지 않고  앞으로 진행했다.

고물상에 묶여있는 백구가 가끔 풀려서 돌아다니기에 그 녀석이겠거니 생각하며 백미러를  흘끗 보았다. 녀석이 전력질주해서 내 차를 쫓아오고 있었다.

'응? 뭐지?'

속도를 늦추며 갓길이 있는 곳으로 차를 대려고 하는데  백구가 차의 앞쪽으로 막아섰다. 급히 시동을 끄고 내렸더니 녀석이 꼬리 치며 다가왔다.

"세상에! 너 흰둥이야? 맞지? 흰둥이지?"

우리 동네에 배회하는 흰 개들이 자주 보였었고 흰 털이 때가 타서  회색빛이 되어 있으니 잠깐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녀석은 온몸을 흔들어대며 입을 헤 벌리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목덜미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줄과 오른쪽 뒷발의 상처를 확인했다. 목줄이 낯익었다. 발은 상처 없이 깨끗했지만 발가락의 벌어진 모양이 틀림없는 흰둥이였다.

무엇보다도 녀석이 나를 보고 너무 반가워했다.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걸 꾹 참으며, 그동안 트렁크에 계속 싣고 다녔던 사료와 간식,  물과 빈 플라스틱 그릇을 꺼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흰둥이는 먹는 것보다 만져주는 것을 더 좋아해서 한참 쓰다듬어준 후에야 사료를 먹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 다섯 달만에 흰둥이를 만난 것이다.

동생 가족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며 빨리 오라고 전화했지만 난 흰둥이를 쓰다듬으며 동영상을 찍었다. 이 기쁜 소식을 남편과  딸들에게도 알려야 했다.

그렇게도 그리웠던 흰둥이가 내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내 마음은  금방 차분해졌다,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매일 우리가 만나고 있었던 것처럼...

다행히도 흰둥이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의 갈비뼈가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건강해 보였다.

그동안 공장 안쪽이나 어딘가에 묶여서 지내다가 목줄의 고리가 벌어져서 사슬이 풀린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부터 줄곧 돌아다니며 살았을까?

적어도 공장 주변의 동네를 벗어나지 않고 지내는 것 같으니 곧 다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차에 올라 문을 닫자 흰둥이가 차 옆에 서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올려다봤다.

따라오면 어떡하지, 위험한데... 생각하며 천천히 차를 움직이자 녀석은 몇 발자국 따라오더니 뒤에서 다른 차가 다가오자 옆으로 비껴섰고 그 자세로 멀어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저녁모임 중에도 흰둥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밤에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우리 집 강아지들을 산책시키면서 흰둥이네 공장  도로갔다. 날이 어두워져서 멀리에 있는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하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곧 우리를 향해 뛰어오는 흰둥이가 보였다.

나와 남편에게 번갈아 오가며 우리가 안고 있는 강아지들의 냄새를 맡느라 킁킁거렸다.

우리의 손길이 좋아서 계속 몸을 비비면서도, 맹렬히 짖어대는 쪼끄만 두 녀석들 때문에 움찔움찔 놀라고 꼬리를 내린 채 긴장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녀석은 우리와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 천천히 주변의 냄새를 맡으며 멀어져 갔다.

이 주변에서 살고 있을 테니 또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남편과 나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이후  흰둥이는 한동안 길에서 보이지 않았다.

다시 주인의 손에 잡혀 사슬 줄에 묶였거나 동네 안쪽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생사를 알지 못했던 상태에서 늘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이제는 잘 살고 있음을 알았으니 됐다.

자유롭게 돌아다닌 후에도 도망가지 않고 다시 잡혀서 묶인다는 것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진돗개의 특성이니 어쩌겠는가.

그 길들여진 삶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감정을 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고 다짐했다.


열흘쯤 보이지 않던 흰둥이가 다시 띄엄띄엄 보이고 매번 나와 우리 가족에게 반갑게 뛰어와 점프하면서 손을 핥고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산책길에 만난 아랫집 아저씨에게 흰둥이 동영상을 보여주니 "아, 얘가 그 흰둥이 맞아요? 얘 겨울 동안 계속 저 아래 집집마다 돌아다니던데요..."라고 말했다. "저기 빈 집에서도 가끔 나오고 깜순이네 마당에서도 놀고 있던데 걔가 흰둥이 맞나 보네요."


공장 주인에게서 아주 버림받은 건 확실하지만 흰둥이는 행복해 보였다. 못 먹어서 마른 모습이 아니며 해맑은 표정으로 뛰어다니는 자유로운 몸짓에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내가 아파트  방향으로 올라가면 더 이상 자기가 따라갈 곳이 아님을 아는 듯 몸을 돌려 주택가 쪽으로  뛰어간다.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눈비를 맞으며 지냈던 몇 달 전보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다.


지금은 주변의 개발이 중단되어 우리 아파트 단지만 우뚝 서 있지만 언젠가는 아랫마을의 몇 채  남은 한옥들이 철거되고 새 단지의 건물들이 들어설 것이다.  그때는 마당의 개들과 돌아다니는 개들이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 생긴 지도 오래되었지만 그런 마음을 다독여본다.

지금 그런 걱정을 미리 하지는 말자고...


그래, 흰둥아, 지금처럼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렴.

오며 가며  만나면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우리 잘 지내보자.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자유와 행복을 즐기자꾸나.

고마워 흰둥아.

살아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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