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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May 14. 2022

당뇨병을 앓고 있는 치매환자

혈당 조절은 너무나 힘든 일...

치매가 무서운 이유는 기억을 잃어가기 때문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했었다.

가족을 몰라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두려울 것인가...

가장 최근에 일어난 사건, 가장 나중에 만난 사람들을 먼저 잊어버리고 점차 그 망각의 범위는 더 먼 과거로까지 넓어진다.

아버지와의 대화 주제는 늘 현재가 아닌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에 대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리워하고 걱정했던 사람은 먼저 돌아가신 엄마나 할머니(아버지의 어머니)가 아닌 증조할머니(아버지의 외할머니)였다.

조금 전에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잊어버렸고, 나중에는 뭔가를 먹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식사를 하고 나서 30분도 채 되지 않아 또 밥을 달라고 하거나 먹을 것을 계속 찾는 것은 치매 환자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아버지도 점점 그렇게 음식에 집착이 심해지고 있었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경우, 식이조절이 안돼서 혈당이 급격하게 오르내릴 뿐만 아니라 제때 약을 복용하지 않아서 추가적인 문제가 발생할 위험도 있었다.




차를 폐차하고 나서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외출이 잦아졌다. 가까운 옛 유원지 주변 산책로까지 걸어 다니며 운동도 되고  기분전환이 될 테니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싶었다.


어느 주말, 아버지와 산책하다가  들른 카페에서  함께 돈가스와 단팥죽을 먹으며 "카페에서 이런 음식도 파는 게 신기하네요"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오래전에 한 번 와봤는데 괜찮더라."

"아빠, 당뇨 때문에 단팥죽은 너무 달아서 안 좋아요"

"내가 언제 얼마나 단것을 먹는다고 그러냐? 그런 소리 말아라. 먹고 죽은 놈이 때깔도 곱다더라"

"당조절이 잘 안 되면 미세혈관들이 막혀서 혈액순환이 안되고 말초신경이 손상돼요. 발톱 자르다가 상처 난 것이 낫지 않고 발가락이 썩을 수도 있고  망막이 손상되면..."

"됐다! 뭔 호들갑은...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아버지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고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계산대에서 카페의 사장이 말했다.

"어르신 단팥죽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요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셔서 단팥죽만 드시네요. 어떨 땐 아침저녁으로 오시기도 해요."

'하아... 오래전이라더니...'

너무 단 맛이 강해서 먹기가 힘들 정도던데 혈당은  어떡하라고...




아버지는 입맛이 없다며 하루에 한두 번씩 외식을 했는데 혈당이 급격히 오르게 만드는 밀가루 위주의 음식이나 단 음식을 주로 찾았고 배달 음식도 자주 시켰다. 탕수육과 짜장면을 먹다 남긴 것을 냉장고에 넣어둔 채 또 같은 음식을 주문하기도 했다.

 

내가 가져다 드린 반찬은 1주일 동안 그대로 냉장고에 방치되어 있다가 내 손으로 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밥을 드리면 거부하니 요양보호사도 나중엔 죽을 만들어서 드렸고, 금요일 오후엔 주말 동안 드시라고  1회 분량씩 소분해서 7~8회 분량의 죽을 챙겨두고 갔다. 친절하게 사진까지 찍어서 내게 메시지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내가 집에 가서 보면 토요일 아침이나 점심쯤 이미 죽은 바닥이 나고 없었다.

"아빠, 아주머니가 내일 저녁까지 드시라고 죽을 많이 만들어 놨다는데 벌써 다 드셨어요?"

"뭔 죽? 죽 구경도 못했다."

"여기 죽 그릇이 잔뜩 쌓여 있는데도요?"

"몰라! 그 아줌마가 안 치우고 갔겠지."

전자레인지의 사용법을 잊어버린 아버지는 가스불에 올려놓고 죽과 냄비를 태우기도 여러 번 했다.


그즈음 아버지는 내과에서 처방받아 드시던 약들을 복용하지 않아서 나와 늘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에 두세 번 복용하는 혈당강하제, 치매약과 전립선약, 항우울제, 아침마다 복용하는 고지혈증 약과 혈전 억제제 등  아버지가 매일 드셔야 하는 약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력의 해당 날짜 칸에 붙여두고 매 식후에 떼어서 드시라고 신신당부하고, 요양보호사에게도 꼭 챙겨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버지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전화를 걸어서 "아빠, 지금 약 드세요."라고 말하면, "아까 먹었다." 아니면, "이따가 먹으련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빠 제발 지금 드세요. 미루다가 또 깜박하시면 안 되니까요. 혈당  조절 안되면 합병증이 무섭다고요!"

"내가 알아서 먹는다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 못 믿는 거냐?"

"못 믿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깜박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냥 지금 드시면 되는데..."

"난 깜박할 일 없다. 네 걱정이나 해라!"

이쯤 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되지만 화를 내봤자 아버지의 반발만 더 커질 뿐이었다.




아버지의 당뇨병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30년도 더 된 것이다. 그 시절엔 의학적 지식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지금처럼 검색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잡곡밥과 약만 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설탕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대학에서 간호학을 공부하면서 당뇨병의 위험성을 알게 된 나는 가끔 잔소리를 했었지만 교과서의 내용을 현실에 대입하지는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합병증이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혈당조절약을 꾸준히 먹고 흰 쌀 대신 잡곡밥을 먹으면 그것으로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실제로 약을 드시는 동안 공복혈당은 늘 정상 범위 안에 있었고 합병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가족 중 누구도 아버지의 당뇨병을 염려하지 않았다.


졸업  대학병원에 취업했으나 중환자실 근무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었고, 결혼과 동시에 전공과는 완전히 멀어진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늘 건강한 모습으로만 보였다, 치매에 걸리기 전까지는.

아니, 치매에 걸렸지만, 엄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치매의 증상이 심해지면서 아버지의 주식은 죽, 고구마, 과자, 커피, 짜장면과 탕수육이었고 과일도 단것만 골라서 1주일 분량을 하루 이틀 만에 다 드셨는데 몸무게는 점점 더 줄고 있었다.

기운이 없다며 밖으로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누워 있으려고만 해서 좋아하는 음식을 포장 주문해서 가져가는 날이 차츰 많아졌다.

무언가 잘 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은 것이 흡수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이 흡수되어 몸에서 에너지원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혈당은 높은 상태일 것이고 근육이 에너지원으로 쓰이니 몸이 점점 말라갈 수밖에 없다. 식이조절과 약 복용에 문제가 생기니 급속하게 모든 상황들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소변 실수를 하게 되고 소변이 묻은 바지들이 집안 곳곳에 널려있었다. 요양보호사와 내가 수시로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지만 다음날이 되면 또 얼룩진 바지들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있고 침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는, "물이 묻어서 말리는 중인데 뭐하러 자꾸 세탁을 하는 거냐?"며 빨래도 못하게 화를 냈다.

"아빠 오줌 냄새 안 나세요?"

"무슨 그런 이상한 말을 다 한다냐? 아무 냄새도 안 나는구먼."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말을 바꾸어 보기도 했다.

"음식 드시다가 흘렸나 봐요, 냄새나니까 빨아야겠어요."

"놔둬라. 내가 나중에 빨 거니까."


하루 종일 벗어 내놓은 바지가 쌓이면서 갈아입을 마른 옷이 없자 사계절의 옷들이 다 꺼내어져 어지럽혀졌다.

집안에서 냄새가 진동하고 방바닥이 끈적거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젠 정말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셔야겠다는, 아니 꼭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 성분 때문에 끈적거리는 소변을 맨발로 밟을 때마다

'이러다간 신장도 다 망가지는 게 아닐까? 망막도 이미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거의 매일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혈당관리를 위해서 병원에 입원하셔야 한다고...

아버지는 절대 병원은 안 간다며 노발대발 역정을 냈고 동생들은 여전히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누구도 직접 모실 상황이 안될 뿐 아니라, 모신다고 해도 우리의 뜻대로 관리가 될 리 만무했다.

이성적으로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시는 게 옳은 선택임에도 동생들이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었고 나도 혼자서 강행하기에는 마음의 부담이 너무 커서 1년 이상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병원 진료를 거부해서 안과나 과에 모시고 갈 수도 없었다. 대리처방으로 받아 온 약들은 쌓여갔다.


나는 집에 갈 때마다 달력의 지나간 날짜에 그대로 붙어있는 약들을 떼어내고 다시 1주일분의 약을 투명 테이프로 붙였다. 그런 나의 행동이 못마땅한 아버지는 약봉지를 뜯어서 손바닥에 올려놔 준 약도 뿌리치고 나중에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누가 보면 창피하다고, 누굴 바보 취급하느냐며 달력에 붙인 약을 모두 떼어버리는 아버지.

지금 약을 드시라고 내밀면 알아서 나중에 먹겠다고 간섭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아버지를 설득하다가 지쳐서 "맘대로 하세요!"라며 포기하거나 나도 같이 소리 지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치매는 그렇게 아버지를 고집불통, 소통불가의 상태로 만들었고 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나서기를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내가 앞장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래, 요양병원만이 답이야. 규칙적인 식사와 약 복용, 대소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삶보다는 낫겠지. 당뇨 합병증은 막아야지. 한 달째 씻지도 않고 이발이나 면도도 거부하는 지금의 상태보다는 관리를 더 잘 받을 수 있겠지...'

그렇게 나는 매일 매 순간 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보내기 위한 정당한 이유들을 찾고 있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 수도 없이 나를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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