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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May 21. 2022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버지와 함께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

엄마가 돌아가신 후 2년 동안 매주 주말이면 아버지를 모시고 산장 드라이브를 하고 외식을 했었다.

친정 집은 옛 유원지와 관광호텔로 이어지는 공기 좋고 풍경이 멋진 동네에 위치하고 있어서 분위기 좋은  카페들도 많다. 매 주말과 일요일, 때로는 공휴일에도 나와 함께 산책과 드라이브를 하고 강아지를 안고 카페에 들어가 창가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매번 "네가 어쩐 일이냐? 통 소식도 없더니..."라는 말로 딸을 맞았다.

늘 다니던 산책길을 걸으면서, 늘 앉던 카페의 창가에 앉으면서도 "참 오랜만이다, 예전엔 자주 왔었는데." 라며 추억에 잠기는 표정을 짓곤 했다.




2021년 1월. 간호사로 요양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내가 일하는 병동에는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 중 조무사 2명의 어머니들과 간병인 1명의  아버지와 수간호사의 아버지도 입원해서 생활하고 있었다.

모든 병원에서 환자들의 면회가 금지되어 있는 코로나 시국에 매일 내 부모를 보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낯 선 환경에서 갇힌 생활을 하는 환자의 입장에서도 자녀를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겠는가...

처음 2주 동안 새로운 일을 배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일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아버지를 모셔 와야지!" 하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교대근무의 특성상 주중에 하루나 이틀을 쉬고 주말에 일을 하게 되면서 아버지와의 주말 일정에도 변동이 생겼다. 유난히 평온하고  환자들의 얼굴에도 편안한 미소가 가득했던 1월의 두 번째 토요일 아침.

그날은 내가 낮 근무를 하고 있으니 여동생이 오전 중에 아버지한테 가기로 했다.


토요일마다 오전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 환자들의 노래자랑 시간이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이전에는 외부에서 강사들이 들어와 노래교실, 미술수업, 레크리에이션 등 다양한 활동들을 했었다고 하는데, 이제 어쩔 수 없이 토요일의 노래자랑 시간이 유일한 오락거리가 되었다.


직원들이 노래방 기계를 원형의 커다란 휴게실 공간에 설치했고 이동이 자유로운 환자들과 휠체어에 앉은 몇몇 환자들이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막 100명 환자들 중 절반 정도의 이름을 외운 나는 병실에 누워 있는 모습이 아니라 노래하고 웃고 손뼉 치는 그들의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밖에 나와 있는 환자들의 얼굴의 특징을 메모해가며 한 명이라도 더 이름을 외우려고 했다.


환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아버지와 비슷했고 그들의 선곡 또한 아버지가 좋아했던 곡들이 많았다.

답답한 병원생활 중에 유일한  그 시간에 몰입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편안한 표정과 음악소리에 나도 휴식을 취하듯 편안해졌다.


신나는 곡을 틀어놓고 음정과 박자를 무시하면서 제 멋에 취해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환자도 있고 멋진 노래 솜씨와 흥에 겨운 춤솜씨를 발휘하는 요양보호사들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간호기록을 멈춘 채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아버지가 좋아했던 노래, '하숙생'.

평소 조용히 TV만 보고  앉아있을 뿐 다른 환자들과 교류하지 않던 조용한 할아버지가 부르고 있었다.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 --- You Tube  영상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공휴일이면 아버지는 통기타를 꺼내 들고 가요 악보를 펼쳤다. 나는 음악 교과서를 들고 거실로 나가 아버지 옆에 앉았고 아버지의 기타 반주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추억에 잠겨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노래는 다른 곡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득한 먼 그곳. 그리움도 흘러가라."

"파란 싹이 트고 꽃들은 곱게 피어, 날 오라 부르네..."

팔순의 할머니 환자 두 분이서 수줍은 듯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정겹다.

음악 실기시험 때 불러야 했기에 아버지의 반주에 따라 목청껏 연습했던 곡이다.   

아버지와 함께 불렀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순간 혼자 힘없이 누워있을 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침 식사는 하셨을까? 기운 없이 누워만 계실 텐데... OO가 가 본다고는 했는데, 점심때나 가보려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과 노래 가사가 머릿속에서 엉켰다.


열흘 동안 환자들의 병동 생활을 지켜봐 온 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갈등했던 마음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 다음 주에 아버지를 모시고 오자!'


간호부장에게 연락해서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여전히 아버지의 입원 시기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그날의 노래방 분위기, 평온한 병동의 분위기에 푹 빠져 입원 날짜를 단숨에 정해버린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가야 했으므로 비번인 셋째 주 토요일을 D-day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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