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타임
20세기까지의 종교적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에게 21세기의 일요일은 힘든 날이다.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 첫 번째 성전인 성당-교회-모스크에서는 찬양과 봉사를 하고, 두 번째 성전인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사노동의 일종인 정원을 열심히 돌봐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아내도 돌봐야 하고, 고3병 혹 중2병에 걸린 아이도 살펴줘야 하고, 최근 데리고 온 고양이 때문에 그놈으로 인해 긴장한 강아지의 동물-심리적 상담도 신경 써줘야 한다. 그의 경우에 다행히 집이 두 채인 덕분에, 아님 학교 가야 하는 아이 때문에 그는 전 가족을 도시로 귀환시켰다.
정원의 연장은 덱(deck 데크)이라 불리는 나무 베란다이다. 집의 본체와 땅을 자연스럽게 해주는 데크는 주로 방부목이나 천연 방부목 재질로 만들기 때문에 흙과 집의 중재(仲裁)하는 역할을 한다. 마치 흙과 꽃을 중보 하는 것이 사람인 것처럼, 우리는 데크를 밝고 자연으로 나아간다.
플루트란 악기의 내부 긴 미로를 따라 더운 숨이 따뜻한 음악으로 변하듯이, 좀 더 긴 목재로 이우러 진 데크를 걷는 과정은 자연의 정령 특히 정원의 초목들이 숨 쉬는 뜰 앞에 그를 일종의 경건한 자제력 안으로 인도한다.
자주 가던 화원에서 그의 지인 말대로 값싸고 월동할 수 있는 허브를 사야만 했다. 이유는 약간의 나이가 있는 독자는 다 이해한다. 화원의 주인은 레몬 타임이란 허브를 추천했다. 월동이 용이하고 가격이 싸고 요리에 응용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다음은 보라색과 분홍 그리고 자태를 뽐내는 붉은빛 나팔꽃 종류에서 결국 보라색을 선택했다. 원래 그는 분홍을 그리고 형은 붉은색을 원했으나 주인이 여름엔 보라색이란 한 마디에 아무 말 없이 사게 되었는데 그는 경박했고, 그의 형은 경솔했고, 주인은 신중했다.
출발이 잘못되었는데 어떻게 결말을 자연스럽게 기다리거나 적응할 수가 있을까? 개체적 생애는 그렇게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연은 여유롭다. 그는 반복적으로 다시 산다. 반면에 개체적 인간 특히 자의식이 두드러진 인간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즉 그의 이 자의식은 언젠가 육체와 더불어 반드시 사라지니 한정된 시간에 늘 초조하다.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나 자신이 신의 정원일 수는 있어도 나의 정원은 신적일 수 없다. 인동초와 백화등은 약간 신적인 속성을 가졌으나 신천초, 방풍나물, 작약과 같은 것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이어서’ 먹혀 버리는 소채도 있다.
의미를 알기 전에 위장 속에서 동화되어버리는 잊어버리고 만 식물종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곧이어 나의 시신경과 말초신경계에 가볍게 접촉하고 스쳐졌지만 기억 회로를 돌아서 대뇌피질의 데이터로 잠시 저장되었다가 사장되는 기억 해야만 하는 인물들도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따라왔다.
그가 생각하길 ‘나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끝나기도 전에 헤어진 첫사랑과 그 이후 만난 아름다운 여인들의 뒤태가 더 이상 뇌의 회로 속에 남아있지 않다.’ 촉감도 잔여 영상도 없다. 그것을 대치하는 것은 단지 드라마에서 본 대리만족의 주인공들의 마지막 장면뿐이다.
우선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나의 몸이란 정원의 관리에서는 이미 실패자였고, 나아가 몸의 연장(延長)으로서 처음 구입한 전원주택의 실제 정원 조성에도 완벽하게 실패한 자였다. 혹자는 이렇게 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몸과 또 다른 차원인 당신의 마음이란 정원에서는? 건물을 조악하게 지었다고 정원 혹은 실내 정원을 망친다는 것은 아주 근대적인 사고이다. 평행 우주론을 모르는가? 마음의 정원은 누구보다 풍요롭게 가꾸었다고 자조했다. 하지만 결과는?
주차장에 깔았던 정원용 흰 자갈들을 나무 데크가 끝나는 곳쯤에 배치하고 잔디의 침입을 경계했더니 생각도 안 했던 어성초들이 흰 돌 사이를 비집고 올라왔다. 정원사는 제갈공명의 병법서를 읽어도 야생초의 게릴라 전술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제갈공명과 체 게바라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생태적 군락들은 서로 타협하는 것일까? 아니면 신의 예정 조화에 따라 질서 있게 배치되는 것일까? 생존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경쟁의 진화론으로 족하다. 하지만 결국 밀려나는 생태계의 낙오자들을 위한 희생의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먹으려고 뿌렸던 소채들에게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날 때 자연은 음식의 영양학에다가 요리의 미학을 얹혀서 인간에게 선사한다. 잎으로는 요리의 바탕색을 깔고 포인트는 꽃으로 한다면, 만약 그것이 식용으로 근사하다면 최고의 조합이다. 푸른색 겉옷이 하늘빛 셔츠와의 어울리는 것처럼.
이처럼 작고 소담한 정원에서는 단순한 식단이 탄생할 수도, 소박한 수채화가 탄생할 수도 있다. 도연명의 아름다운 시를 생산한 것은 계림이란 놀라운 자연이었지만, 적어도 영국의 작은 정원에서는 바이런과 셸리 그리고 키츠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