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3

장미

by 박종규


정원의 정원 다움을 지키는 일은 늘 상 그렇지만 또 다른 자연스러움과의 조우(遭遇)이다. 지구 위에서 원시적 자연은 곧 사라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경고하지만 자연선택의 최종적 결과가 인간종의 번성이라면 그런 인류가 개조하는 환경은 곧 진화된 자연이다.


모든 정원에는 종교적 개종을 강요하듯이, 규정화된 퇴비를 주고 특정한 식물 군락(群落)을 고집하는 정원사와 야생으로부터 살아남은 식물 군락들의 반격이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잔디밭에는 가장 강력한 적인 클로버란 식물 군락이 침입한다.


누군가 정원의 한 구석에 채소밭을 만든다고 치자. 그가 채소를 키울 때마다, 채소마다 마다에 자연-역사상 최적화된 균류에서부터 곤충류까지 인류와 경쟁적 관계에 있는 병균과 해충들이 찾아올 것이다. 농학적인 농부에게는 가뭄과 해충이 최대의 적이지만 미학적인 정원사에게는 가뭄보다 균과 곤충이 더 일차적인 적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인생이란 각자의 작지만 큰, 육체적인지만 정신적인 정원에도 원하지 않는 적들이 항상 침입하는 법이다. 때로는 그 적들이 나를 키웠지만, 때로는 그 적들이 승리하였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많은 고난이 나를 강건하게 했다고. 우리 안의 무엇이 그렇게 강건하게 되었을까?


살아남은 것들은 강하다. 하지만 슬픔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인위적으로 개량된 종자를 보던 아님 야생적으로 생존한 종자를 보던 그것들에게는 일종의 아픔과 슬픔이 내재한다. 특별히 식물에게는 삶과 역사를 견딘 그들 조상의 아픔과 다른 많은 종들을 경쟁에서 탈락시킨 슬픔이 존재한다.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아픔과 슬픔은 그들만의 향기로 승화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식물의 향기이던 동물의 냄새이던 그것은 생물학적 유혹의 몸짓 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고난이 고유함으로 내재화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종류의 향기이던 그 향을 맡을 때마다 그들 종만의 슬픔을 이해한다.


다시 말하지만 향기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전래된 것이다. 그래서 희극보다 비극이 더 아름답다. 비극은 오래 기억할 수 있는 향기가 남고 희극에는 곧 망각할 공허한 메아리만 남는다. 예민한 정원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은 들 어떠하랴.


혹자는 정원의 향기 하면 백합과 장미를 떠올릴 것이다. 보자. 하지만 나에게 장미는 추억의 향기가 아니라 언어의 추억이었다. 내가 작은 정원에 장미를 키우는 이유 중은 향기가 아니라 언어 때문이다. 장미는 그만의 향기에게 서가 아니라 어둡고 격동적이었던 청춘 시절 읽었던 보들레르의 시 한 구절에게서 왔다.


“그대는 맑은 장밋빛 아름다운 가을 하늘! 그러나 슬픔은 바닷물처럼 내게 밀려와, 썰물 때는 실쭉한 내 입술에 씁쓸한 진흙 같은 쓰라린 추억을 남긴다.”


장미가 화려한 계절에 누군가의 정원에 들어섰을 때 화단 가운데 붉고 흰 장미 군락이 있다면 그것들은 아마 정원을 압도할 것이다. 인물화와 달리 풍경화는 소재의 개성보다는 전체의 조화를 꾀한다. 뛰어난 정원사는 자연 속의 조화를 인위적으로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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