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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이데올로기 7

하이퍼자본주의: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by 박종규 Mar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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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의 세계가 20세기 불평등주의체제의 진화에 각인된 거대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전환들의 직접적 소산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공산주의의 몰락은 <정의로운 경제의 가능성 일체에 대한 환멸의 확산>으로 이어졌는데, 21세기 초 현재의 정체성주의적 퇴행을 부추기는 이 감정은 극복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현재의 신소유주의 이데올로기는 19세기의 지배적인 소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차이가 많고 겉보기보다 더 혼성적이며 취약하다고 해도, 이 소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회귀는 명백하다.


현 21세기 초에 세계적 수준에서 시행되는 불평등체제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지구의 다양한 사회들이 전래 없는 강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세계화는 매우 장구한 과정이다. 인적 교류와 정보 이동의 규모는 1990-2020년 하이퍼자본주의적 디지털 세계화를 거치며 전혀 다른 차원에 들어섰다. 이러한 진화들은 광범휘한 균형 회복과 인구 급증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세계의 이러한 접속이 불평등주의체제의 사회정치적 다양성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총소득에서 상위 10프로의 몫은 유럽에서는 35% 이하이고, 중동, 남아공, 가타르에서는 70%에 근접한다.  

국민소득에서 가난한 50%와 그다음 40%, 그리고 부유한 10%에게 돌아가는 몫을 검토해 보면, 나라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확인하게 된다. 가장 덜 불평등한 나라들에서, 총소득에서 부유한 10%에게 돌아가는 몫은 가난한 50%에게 돌아가는 몫에 비해 '단지' 1.5배 더 큰데, 가장 불평등한 나라에서는 7배 더 크다. 이를 보면 불평등 수준이(유럽을 포함해서) 지구의 거의 모든 곳에서 높은 데다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불평등의 정점에는 중동과 같은 지역이 있다. 중동의 불평등은 1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영국이 지역에 수립한 국경체제와 서양 열강이 석유-왕국들에 제공한 타산적인 군사 보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평등과 기후 문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기후온난화의 해결 또는 적어도 그 완화를 위해서는 생활양식의 실질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유명 패션 브랜드에서는 소비 패턴의 추위에 맞추어서(과도한 소비를 유도하는) 계절별 상품 출시를 거의 일주일 단위로 아니면 수시로 다양한 신상을 쏟아내고 있다. 다른 제조업계 역시 마찬가지의 트렌드를 따른다. 부자든 거지든 소비에 중독된 것이다. 이것은 탄소배출량과 기후온난화 그리고 해양 생태계 파괴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불평등과 부의 분배에 대한 민주적 투명성이라는 문제가 본질적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만한 하고 체계적인 자료에 근거한 명료한 지표들이 없기에, 세계적 차원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일국 내에서나 지역 차원에서 차분한 공적 논의를 발전시키기가 불가능하다. 피케티 자신이 사용하는 데이터는 주로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에서 가져온 것이며 그나마 다양한 가용자료들(국민계정, 가구조사, 상속과 세금 데이터 등)의 체계적인 대조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별 세밀한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보기에 또 다른 문제는 국가재정 투명성의 부족이다. 안타깝게도 조세재정 데이터를 개방하라고 중앙정부와 구 행정부서들에 가하는 압력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국제 조세체계와 법률체계의 진화 역시 가용 데이터의 질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 세계화된 다국적 기업들이 각 나라에서 적용되는 조세와 본사가 위치한 나라의 조세제도와의 차이와 국제법적 조세체계의 변화는 더욱 불평등 지표를 측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거기에다가 현대의 공산주의자든 아니면 억만장자들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믿으며, 대부분 지구공학을 열렬히 좋아하고 단순하고 따분한 해법(세금 내기, 검소하게 살기)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일부의 억만장자들도 있다. 만약에 미리 불평등구조가 지구적 환경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다는 사실이 부자들에게 확고하게 인지가 되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성취 욕망을 단순히 자산 증가에만 집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제 사람들은 억만장자가 민주주의제도에 끼치는 해악이 염려스러울 정도로 심각하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문제의 본질은 <왜 사람들이 그렇게 끝없는 욕망과 충족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인 저자는 사회적 체제의 이데올로기 문제로 이 물음을 바라본다. 마르크스가 실패한 것처럼 사적 소유를 없앤다고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유세를 효율적으로 부가한다고, 기본소득을 국민 전체에 준다고 해서 평등지수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잘못된 욕망 구조가 정상화되지 않고서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경제학자인 그의 대안을 들어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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