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시규획전람관, 수도박물관, 동남각루 성벽유적, 서편문 성벽유적
일찍이 베이징성의 온전한 보존을 주장했던 량쓰청은 "베이징 성벽을 뜯어내는 것은 내 살갗을 벗겨내는 것과 같다!"라고 통탄하면서 "50년이 지난 뒤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50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의 딸 량짜이빙은 옛 자취를 잃어버린 현재 베이징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베이징이라 불리는 곳에 살고 있을 뿐이다. 진즉에 이곳은 나의 베이징이 아니다."
- 이유진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성벽이 과연 어떤 의미였길래, 성벽 철거가 살갗을 벗겨내고 도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을까? 단지 건축사학자의 학술적인 관심과 애정이었던 것인지 대부분의 북경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이방인으로서, 비전문가로서 알 수가 없다. 다만 성벽 철거에 대해 그 당시에 가장 합당한 이유를 토대로 진행하여 도시를 개발했을 것이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 당시에 가장 합당한 이유로 성벽과 성문 유적을 보존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무엇이 최선이었을까?
양사성 (梁思成/량쓰청, 1901~1972년)은 중국의 건축사학자로서, 1928년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중국 건축교육의 개척자이자 중국 고대 건축 연구의 선구자로서, 중국 고대 건축문물과 고성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2000년 중국건축학회(ASC)는 중국의 건축을 알리기 위하여 중국 건축 교육의 현대적 시스템의 창시자인 량쓰청 교수의 이름을 따 양사성 상(償)을 만들었다.
모택동이 북경에 정부의 중심을 세우기로 결정하자, 양사성과 진점상(陈占祥/천찬샹)은 북경 구 도심 보호 방안인 ‘중앙인민정부 행정중심구 위치에 관한 건의(량∙천 방안)를 통해 북경의 고건축과 성곽을 보존하기 위해 북경 서쪽에 새로운 행정수도를 세우자고 건의했다. 행정수도를 도시 외부에 건설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의미가 상당한 북경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은 중국의 당시 기본 사상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가 강조한 것은 혁명이지 문물 보호가 아니었다. 혁명은 파괴와 개조를 의미하며 중국에 신생 국가를 세우려면 북경을 재건하는 것이 진리라고 여겨졌다. 그 후의 몇 년은 파괴의 시간이었다. 파괴되어야 하는 것, 즉 특권 통치계급의 권위와 부패 그리고 구시대를 의미하는 북경 성곽은 성곽은 파괴되어야 마땅한 대상이었다. 공산당 정부는 도시발전의 요구에 따라 사통팔달의 큰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도심의 고건축 군들을 파괴하였다.
역사는 그 순간에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일까?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가치를 되돌아보고 아쉬움으로 남는 것일까?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넓은 땅과 많은 인구와 다양한 민족이 있기에, 나의 경험과 느낌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중국에 와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아쉬움을 아쉬움이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그 순간과 이 순간의 최선의 결정만 있을 뿐.
이방인으로서의 성문과 성벽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기에 흥미로운 장소 몇 군데를 정리해보았다. 어떤 도시이든지 관심을 가지고 알아 나가는 것이, 그 도시에 대한 애정을 키우며 애정이 커질수록 나의 삶도 안정적이고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애초부터 작정하고 좋아했던 곳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1년이든 10년이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곳에서 나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北京市东城区前门东大街20号 (지하철 2&8호선 前门역)
북경 도시 구조, 도시 건설 계획과 발전, 역사 등을 전시하며, 모형과 시청각 자료들로 흥미롭게 설명되어있어서 아이들 동반하기에 좋다.
* 방문기 : https://blog.naver.com/yjseokim/221194395515
북경 시내 중심에 있는 천안문광장 동남쪽에 위치. 국가 4A급 관광지로 2004년 9월 24일 정식으로 대외 개방되었다. 북경 시내의 기획 건설 발전의 역사와 현황, 미래를 모두 전시하고 있는 대형 테마 전람관이다.
북경만 (北京湾/베이징완)
북경 소평원과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주변 환경을 60,000:1 비율로 재현하였다.
북경구성 (北京旧城/베이징쥬청)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벽면에 1,000:1 축척으로 1949년에 제작된 북경구성이 있다. 이는 높이 10m, 너비 9m로 매우 거대한 청동 부조이다. 전통 납청동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1949년 북경 도시의 전체 구조와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옛 북경 도시의 전체적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축선(中轴线) 모형
북쪽에서부터 올림픽공원 ~ 고루&종루 ~ 경산공원 ~ 자금성 ~ 정양문&전문대가 ~ 영정문까지 반듯한 한 줄로 늘어선 북경의 도시 계획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다.
북경도시기획모형(北京城市规划模型)
3층에 위치한 북경시 미니어쳐.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미니어쳐 중 하나로 모든 모형 전시구역이 1,300평방미터에 달하며, 1:750 비율로 만들어졌다. 그 중 모형 면적은 302평방미터이며, 모형 주변 1천여 평방미터에 비행기에서 같은 비율로 촬영한 사진으로 만든 조명 광고판을 설치해 전시하고 있다.
北京市西城区复兴门外大街16号 (지하철 1호선 木樨地역)
수도로서의 북경의 지위와 역사에 대해 초점 맞춘 박물관이다.
* 방문기 : https://blog.naver.com/yjseokim/220808356548
2층 베이징 역사, 그리고 5층 베이징 옛 생활 모습 전시가 흥미롭다.
北京市东城区崇文门东大街9号 (지하철 2&5호선 崇文门역)
* 방문기 : https://blog.naver.com/yjseokim/221993131766
1950년 경 북경 도시계획에 따라 북경의 모든 성벽이 철거되었다. 더불어 소련과의 관계악화로 지하철 건설이 바로 전쟁준비로 연결되는 상황이었다. 대부분 북경 성벽들이 철거되었는데, 숭문문(崇文门) ~ 내성 동남각루(北京城东南角楼) 까지 남아있는 부분이 현재 명성벽유적공원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민가들이 성벽 담에 기대고 있어서 그나마 성벽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2002년 공원으로 완공되었으며, 총 길이 1.5km이다.
성문들의 옛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
내성(內城) 9개문 & 외성(外城) 7개 문
성문 관련하여 현재 남아있는 5개 건축물 - 덕성문 전루 (德胜门 箭楼), 정양문 성루 & 전루 (正阳门 城楼 & 箭楼), 영정문 성루 (永定门 城楼, 복원), 그리고 이곳 내성동남각루 (内城东南角楼)와 성벽일부.
오랫동안 민가들이 성벽 담에 기대고 있었던 모습. 민가들 덕에 성벽이 철거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니 아이러니하다. 다닥다닥 붙은 민가들이 성벽을 보호하고 있던 당시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북경성벽유적공원 (北京城墙遗址)
北京市西城区下斜街26-1号宣武医院东门 (지하철 2호선 长椿街역)
*방문기 : https://blog.naver.com/yjseokim/222556085115
베이징 외성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서편문 (西便门/시벤먼) 성문이 있던 자리에,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1952년경에 서편문 성루, 전루, 옹성이 철거되었으며, 1966년, 지하철 건설 시 부근의 성벽마저 철거되었다. 1988년 베이징시정부는 성루 동측에 잔존했던 195미터 내성벽 일부를 보수하고, 외성과의 연결부에 성루를 복원했다. 당시에 7곳의 단절된 명성벽 유적지를 시급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