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글뽀글 긴 파마머리를 집게로 고정한 올림머리,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황금빛 링 귀걸이,
발목 가까이 내려오는 화려한 무늬의 주름치마.
기억 속 할머니는 언제고 한결 같았다.
엄마는 첫 상견례 자리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조신한 한복 차림의 외할머니와 달리
할머니는 야유회 도중 달려나온 듯한 행색이었단다.
외관은 현란해도 말수는 적었던 할머니는
쫙쫙 껌 씹는 소리로 어색한 정적을 달랬다고.
상견례는 30분만에 끝났다.
아빠가 엄마를 선택한 것도 할머니 스타일과 정반대라서다. 아빠의 소원대로, 엄마는 평생 생머리를 질끈 묶고 귀도 뚫지 않고 티셔츠에 바지를 즐겨 입는 수수한 모습을 유지했다.
아빠가 스무살, 이등병 시절에 남편을 여읜 할머니는 휴게소에 식당을 차려 큰 돈을 벌었다. 할머니는 손맛이 좋았다. 동거하던 남자 친구가 몇 차례 바뀌는 과정 속 할머니의 식당도 이리저리 이사했는데, 식당의 크기가 점점 줄더니 나중엔 테이블 두어개가 전부인 치킨집이 됐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탓이었을까, 치킨집은 손님이 너무 없었다. 초등학생 때 할머니 치킨집에서 양념통닭을 먹은 적이 있는데, 냉장고에서 꺼내주신 콜라가 김도 빠지고 아무맛도 나지 않아 크게 실망했다.
할머니가 끝내 식당을, 생업을 중단해야 했던 것은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으면서다. 당뇨만큼 관리가 중요한 병이 없는데, 할머니는 약도 잘 챙겨 먹지 않고, 병원도 제때 찾지 않았었다. 딸기 우유와 메가톤바, 믹스 커피를 제일 좋아했고, 병세와 상관 없이 즐겨먹었다.
요양원 생활 중.
할머니의 사타구니는 그 누구보다 크게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돈을 보관할 곳도 마땅하지 않았지만, 누가 가져갈까 무서워 전재산인 1만 원짜리 200장을 하의 속옷에 붙이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병문안을 가면 할머니는 딸기우유를 사달라 칭얼댔고, 아빠가 만원짜리 몇 장을 주면 세상 기뻐하며 속옷아래에 집어 넣었다.
당뇨발이 악화됐을 때, 의사는 수술 후 할머니가 의식을 못 찾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결국 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포기했고, 할머니는 발작적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영원히 양말을 벗지 못하게 된 할머니의 왼쪽발. 푸른색이 도는 잿빛 발을 본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할머니, 제가 기도해도 돼요?”
“그래, 기도해라.”
불쌍한 우리 할머니, 이 발을 어떡하면 좋냐고, 평생 고생만 하셨는데, 할머니 이제 안 아프게 해 달라고, 하나님 믿고 구원 받게 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눈가가 젖은 할머니는 바지 속에서 면 보자기에 싸인 현금 다발을 꺼냈다.
“진아, 이 돈 좀 가져가라. 할미가 달라고 할 때까지 니가 갖고 있거라. 아무도 주지말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철모르고 눈독 들이던 삼촌에겐 불 같이 화내며 사수한
최후의 쌈짓돈을,
스르륵 내 손에 쥐어줬다. 아빠와 고모가 병문안 때마다 쥐어준 지폐가 모이고 모여,
200만 원은 253만원으로 불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