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산 호랑이라면, 엄마는 강아지풀이었다.
강아지 꼬리 모양의 부드러운 풀이 바람에 한들거리듯.
엄마는 언제나 아빠 앞에 순종하고 권복(勸服)했다.
“뜨신 물 콸콸 나오는 아파트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신혼 초, 엄마는 나란히 누운 아빠의 귓전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투정 끼 다분한 이 볼멘소리가 젊은 아빠의 남성성 혹은 승부욕 그 비스름한 것을 자극했는지. 아빠는 2년 반 가까이 하루 쉬는 날도 없이 택시 운전을 했고, 정말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아파트를 장만해 냈다.
하나의 소원이 이뤄지면 엄마는 다음 단계의 소원을 빌었고, 아빠는 퀘스트를 깨듯 엄마의 소원을 계속 성취해 나갔다. 그러니 엄마 입장에서는 이 멋진 남자를 믿고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말 보다 행동으로 눈앞의 결과를 보여주는 사람. 바라던 미래를 진짜 현실로 안겨주는 사람. 우리집은 그렇게 엄마의 적극적인 복종과 아빠의 절대적인 권위가 맞물려 화목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환경이 조성됐다.
무한 복종과 무한 권위의 굴레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종속자에서 관찰차로, 관찰자에서 도주자로 진화했다.
안정적인 우리집이 나의 자랑이었던 시절, 아빠는 나에게도 멋진 사람이었다. 힘세고 강한데 가정 건사할 능력도 있는 사람. 세상 누가 와도 아빠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기객관화가 가능해진 어느 날부터는 아빠가 폭군 같았다. 정답은 모두 아빠 속에 있고, 나는 그 정답의 끝을 알지 못했다. 그때 그때 지시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답답함. 내 속에선 이미 내가 자라나 버렸는데, 아빠는 훌쩍 커버린 나를 묵살하고 있었다. 이 시스템에서 탈옥해야 했다. 꽃다운 스무살을 재수(再修)의 블랜더 속에 갈아 넣고 ‘자취하는 대학생’ 신분이 된 끝에야 물리적 도주에 성공했다. 중국 어학연수 1년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빠의 심리적 지배에서도 도주했다. 더 이상 아빠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동기들 모두 대기업 입사를 준비할 때, 나는 술과 연애에 진탕 빠졌고. 4학년 마지막 학기가 됐을 때 아빠가 싫어하는 ‘기독교’ + ‘언론사’만 골라 원서를 냈다. 내 눈에 좋은 길을 향해, 줄 없는 망아지마냥 돌진했다. 자유에 흠뻑 젖은 망아지였다.
다만, 도주 경로에 막다른 길이 나올 줄은 몰랐다.
다시 대구 본가로 돌아갔을 때, 아빠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흔한 잔소리 한 마디 없었다. 대신 이틀이 멀다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박 한 덩이를 사들고 퇴근했다. 나는 원 없이 수박을 먹고 또 먹었다. 엄마는 유난스러운 아빠의 수박 구매에 종알종알 질투어린 말들을 내뱉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 바람이 깊어질 무렵, 드디어 털고 일어나 서울로 올라갔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나는 도주자 모드였고, 아빠를 지독히 미워한다고 믿었다. 와작와작 씹어 삼킨 한 트럭의 수박에 힘입어, 지금 선 줄도 모른 채.
아빠를 향한 엄마의 눈 먼 사랑이 눅진히 스며들어,
그 사랑을 보고 자란 나 역시 맹렬한 간절함으로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아빠가 정말 내 세계에서 곧 존재하지 않게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다. 엄마는 목이 쉬도록 울고 또 울며, 의사가 시한부 선고를 했다고 울부짖었다.
나는 다시 독방에서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빠 대신에, 하나 쓸모 없는 나를 데려가시라고요. 아빠는 우리 엄마, 동생들, 삼촌들, 막내 고모한테,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사람 구실 못하지만 하나님 알고 믿는 나를 데려가시라고요!
나는 쓸모 없으니까, 나는 실패자니까.
아빠 말고 나를! 아빠 말고 나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