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법대를 갈 건지, 재수를 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해.”
흐린 겨울이었다. 커튼을 치지 않아도 방은 충분히 어두컴컴했다. 나는 울고 있었다. 방구석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빠가 허락한 두 가지 길은 모두 내 길이 아니었다.
수능 점수는 아쉬웠다. 연세대, 고려대를 가기엔 부족한 점수였고 경북대 법학과를 가기엔 넘치는 점수였다. 그래도 서울권 여러 대학을 충분히 갈 수 있는 점수인데, 기분 좋게 전공 학과만 정할 수는 없는 걸까? 경북대 법학과를 가든지, 그게 싫으면 다시 재수를 해서 연고대 이상을 가라는 압박. 나는 왜 원하지도 않는 선택지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건지, 울음에 분노가 섞이니 가만 누워있을 수 없었다. 방문을 걷어차고 거실로 나가 엄마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입을 벌려 스트레스로 헐어티진 잇몸의 수포성 염증들을 까보였다.
“엄마가 아빠 좀 말려주면 안돼? 나는 정말, 정말, 둘 다 싫단 말야!”
거기까지였다. 엄마도 나도 다음 스텝은 몰랐다. 울고불고 끙끙 앓은 끝에 나는 재수를 선택했다. 연고대가 좋아서가 아니라 보기도 싫은 아빠를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재수기간까지, 2년간. 아빠는 나를 새벽 4시에 깨웠다. 공부하라는 거였다. 그러면 나는 그 길로 우리집 바로 뒤편에 있는 교회를 갔다. 새벽예배를 준비하는 예배당은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찬송가 멜로디로 고요하고 아늑했다. 무려 2년짜리 새벽기도를 나간 셈이다. 그 시간에 기도를 했느냐. 아니, 나는 어떤 소원도 빌지 않았다. ‘하나님, 저 왔습니다.’ 이 한 마디만 했다. 평안한 새벽예배 시간은 그 자체로 나를 치유했다.
두 번째 수능 점수는 첫 번째 수능 점수보다 조금 더 나았다. 그러나 안정 지원했다고 믿었던 고려대에 불합격하며 SKY 입성은 끝내 실패했다. 아빠는 유일하게 합격한 3지망 대학의 입학을 허락했다. 3지망 역시 대학도 전공도 아빠가 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빠를 피해 서울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나를 기쁘게 할 요소가 하나도 없는 대학 생활을 꾸역꾸역 영위했다.
아빠는 졸업식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아빠도 나도 어느 누구도 만족하지 못했던 대학 생활. 그 후 이어진 사회 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아빠가 억지로 끌어다 앉힌 출발선에서 내가 바라던 꽃동산까지는 너무 멀기도 멀었고, 길도 없었다. 돌길에 자전거를 타고 나간 사람. 앞바퀴 타이어가 터지고 체인도 주르륵 흘러내려 자전거도 나도 뾰족한 돌 무더기 위에 털썩 앉아버린 어느 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본가로 들어왔다. 나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신 나간 사람이 되어 아빠를 몰아부쳤다.
“대학도 아빠 마음대로 정했잖아. 그때 왜 나한테 안 물었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왜 한 번도 안 물었어?”
이 가냘픈 자전거로는 험준한 돌밭 구간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내 의사와 무관한 출발선에 나를 갖다놓았던 아빠에게 모든 실패의 책임을 떠넘기고 싶었다.
“변호사….”
“응?”
“말을 잘하니까... 어려서부터 말 잘하는 네가... 변호사가 되면 좋겠다 싶었었다."
아빠가 원했던 도착지는 고공(高空)이었다. 내가 갈 수 있는 최대한의 높은 지점까지 올라가주기를. 이과와 문과 중 하나의 경로를 정하던 날, 그날에 이미 아빠는 나의 출발선을 확정해 놓았으리라. 결국 문과를 선택했으니 1지망은 법조인, 그 다음은 아무리 못해도, 아무리 못해도, 대기업은 가도록.
서로 다른 의미로 각자의 꿈이 이지러진 나와 아빠는
눈 아래 방바닥을 노려보며 격렬한 패배감을 맛봐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