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1개월만에 기자를 관뒀다.
선배가 그랬다. 기자의 원동력은 ‘야망’이라고. 나에겐 그 비스무리한 것도 없었다. 글쓰기가 좋아 막연히 기자를 택했지만, 기자에게 글쓰기 스킬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들은 19세쯤 했을 고민을,
나는 29세가 다 되어 시작했다.
난 무엇을 해야 행복할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의 꿈, 오랜 꿈, 작곡가.
창모님처럼 나도 다섯살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8세 때 청음이 트이면서, (학원 선생님은 몰랐겠지만) 악보를 안 봤다.
귀로 들리는 멜로디를 외워서 피아노로 쳐냈다.
13세부터는 작곡을 시작했다. 독학이었다.
중학생이 된 후 피아노 학원은 그만뒀다. 그게 다였다.
방송국에 사직서를 낸 후, 방송국에 CCM 가요제 참가 신청서를 냈다. 내가 몸담은 방송국은 매년 찬양사역자를 선발하는 가요제를 열었는데, 본선 10인에 들면 음반을 정식 발매할 수 있었다. 두 달 동안 곡을 만들고, 스튜디오를 빌려 녹음을 했다. 스튜디오 측에서 알선해준 기타리스트로부터 세션을 따고 데모 CD를 만들었다. 2년치 퇴직금은 그렇게 아스라이 사라졌다.
어떤 분야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경험이 있으면서 망상력도 높은 사람은 이런 이상한 선택을 한다. 노력하면 만점을 받을 수 있는 학업 성적과 특정 분야의 컨테스트는 엄연히 다른 것인데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오래 묵힌 꿈이니까, 전재산을 올인했으니까, 분명 성과가 있으리라고 드라마 같은 앞날을 기대할 뿐이다.
그 망상에 불을 지피듯, 서류 심사를 통과해 생방송 예선 무대에 오르게 됐다. 이 무대에서 고득점을 받은 2팀은 본선에 진출한다.
“본선까지 진출하면 그때 아빠한테 말하자. 알겠지?”
여동생은 나의 도전을 응원할 유일의 시청자였다. 그런데 여동생은 이렇게 크고 대단한 도전을 자기만 알고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단다. 나라면 반드시 예선을 통과할 거라 믿었단다. 언니는 언제나 우리집의 기대주였으니까. 노트북으로 예선 무대 생방송을 시청하던 동생은 느닷없이 아빠를 불렀다. 그리고 노트북 화면을 돌려 건반 앞에 앉아 마이크에 입을 댄 나를 보여줬다.
“아빠, 이것 좀 보세요! 언니가 가수 겸 작곡가가 된대! 이렇게 중요한 무대를 아빠가 꼭 봐야한다고 생각해.”
여동생은 아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아빠는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무대를 30초가량 지켜보다가 말없이 방을 나가버렸다고 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꿈꾸던 나의 뜨거운 망상과
근거 없이 지대한 동생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