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 입소한 지 1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반년 후, 엄마는 요양원에서 코비드에 감염되신다.
의사가 요양원에 방문해서 백신을 단체 접종하는 다른 요양원과는 달리 이 요양원은 보호자에게 개인별로 부모님을 모시고 외부 병원으로 나가서 접종을 하라고 하는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다. 이러한 경로로 일단 감염 환자가 하나 둘 생기니 요양사들도 연달아 감염되고 단체 생활을 하시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노인분들에게 급속하게 퍼졌다. 그때는 코로나 환자가 너무 많아져서 병상이 부족한 때라 엄마는 구급차 안에서 빈 병상을 기다리느라 체력이 더 떨어지셨다. 한나절이나 대기하다가 간신히 충청도에 있는 전담병원 중환자실로 후송되셨지만 고령인 엄마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셨다. 희망이 없다는 의사의 통고를 받고 나와 오빠와 함께 새벽에 급히 내려가서 의료진이 착용하는 방호복을 입고 병동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조그만 몸에 주렁주렁 장치를 달고 산소마스크를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셨다. 나는 의식이 없는 엄마의 귀에 대고 우리 엄마 되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우리도 나중에 가서 만나자고 말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엄마는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등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를 통과해서 살아오셨다.
개인적으로 자식들은 반드시 최고 교육까지 시키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사셨고 그것을 실제로 지키셨다.
아버지를 닮아 느긋하고 다소 게으른 우리 형제들이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순전히 엄마의 소망과 정성 덕분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머리가 평균은 되었고 크게 말썽 부리는 자식도 없어서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였고, 엄마는 속세의 욕심을 채우지는 못했어도 그 부분에 자부심을 가지고 사셨다. 나도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이 좋아서 더 노력한 기억이 난다.
엄마는 몸이 약하셨지만 열심히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셨고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손이 많이 가는 만두도 원 없이 만들어 주셨다.(결혼뒤에도 내가 좋아한다며 늘 만두를 냉동했다가 주셨다.) 막내딸인 나는 너무 어렸고 남자 형제들만 있었던 우리 집에서 만두를 빚는 사람은 엄마 혼자밖에 없었어도 그 많은 만두를 혼자 다 만들어 주셨다. 우리 집은 설날에 만두가 대부분이고 가끔 떡이 들어간 떡국을 먹었는데 다른 집도 다 그렇게 먹는 줄 알았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대부분은 떡이고 만두는 한 두 개 들어가는 떡국을 먹는 집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도시락 세대였던 나는 엄마의 도시락 반찬에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는지 안다. 친구들 반찬에 비해 종류도 다양하고 남은 반찬이 아닌 새로 만든 반찬을 항상 넣어주셨다. 솔직히 우리 집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에 한 번도 결핍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엄마의 사랑과 정성 덕분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징후가 많았으나 심리적인 충만감 때문에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또한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우리 집에는 항상 친척들이 있었다. 엄마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지 않았는데도 서울에 살지 않는 친척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 집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엄마는 그분들에게 정성껏 환자 음식까지 만들어서 대접하는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놀라운 것은 엄마가 80대 말까지도 은행에 직접 다니시며 예산 안에서 수입 지출을 관리하며 살림을 하시는 독립적인 분이셨다는 것이다. 그 후 혼자서는 슈퍼와 은행을 다닐 수 없게 되고 병원이나 슈퍼나 절에 행차할 때에 자식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전히 살림의 주도권을 가지고 사셨다.
마지막 1년을 요양원에 가시게 되었을 때도 엄마는 과거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을 그리워하시며 끊임없이 요양원 탈출을 꿈꾸시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셨다. 엄마는 빠삐용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분이었던 것이다.
말년에 노화로 인해 몸을 잘 움직일수 없어서 자식을 통해서만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와 요양원에 들어가셨을 때 독립적인 엄마의 상실감과 우울감이 컸다. 남자가 많은 집에서 엄마의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은 딸인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모든 감정을 나에게 털어놓으셨고, 거기에는 부정적인 것도 많아서 나도 영향을 많이 받게 되니 내 마음도 힘들었다. 엄마가 서운한 생각만 하시다 돌아가실까 봐 걱정도 되었고, 엄마가 생의 끝자락에서 마음 편히 옛날 엄마의 전성기, 즉 좋을 때를 기억하시기를 바랐다.
누구나 인생의 말기에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 그 사람을 관통하는 고유한 정수가 희미해진다.
독일의 심리학자 오이겐 드레버만은 나이 든 부모의 마음은 폐허로 상징된다고 한다.
한때는 너무도 아름다웠던 건축물이었으나 이제는 세월이 지나 무너지고 흔적만 남은 폐허.
과거 아름다웠던 건축물의 자태를 기억하는 사람은 자식들밖에 없다고 했다. 고집부리는 엄마 때문에 너무 힘들었을 때 이 글을 읽고 깊은 위로를 받았다. 마지막 엄마의 모습 때문에 나에게 엄마가 계속 부정적으로 기억될까 봐 무서웠을 때, 이글이 해답이 되어 주었다. 엄마의 참모습은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통해' 구현한 정수인 것이다.
수십만 광년 떨어진 우주 속의 엄마별은 사라졌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지구로 여전히 과거의 별빛이 쏟아진다. 오랫동안 아름답다. 최소한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반짝인다. 하늘을 향해 망원경을 들고 일부러 그 별을 찾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식밖에 없다.
엄마의 사랑과 소망을 담은 별 빛이 나에게 다다를 때마다, 나는 나태하게 주저앉으려는 자신을 다잡고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잘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