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 들어가신 지 반년만에, 아버지는 평소처럼 저녁을 드시고 기관지의 답답함을 호소하시다가 호흡곤란으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가시다가 돌아가셨다. 병원으로 가신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으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여서 임종도 못하였다. 불과 1주일 전에도 아버지를 뵈었는데, 정형외과에 가시느라 병원에 갔을때 이런일은 상상도 못했었다. 요양원에서 기도의 이물질 제거 조치를 빨리 했었더라면 어쩌면 고비를 넘기지 않았을까 하는 속상한 마음이 들어, 응급조치도 못하면서 무슨 프리미엄이냐고 요양원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때를 넘겼어도 이미 너무 많이 약해진 아버지가 오래 우리 곁에 머무시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병원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여주었을 때 그 모습이 마치 평소 주무시는 듯 고요하고 편안하셔서 한결 위안이 되었다. 차가운 아버지의 뺨과 이마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작별을 하였다.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어려운 시기를 거치며 우리 4남매를 키워주신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가장의 의무를 다하셨다.
막내였던 나는 어릴 때 엄마 아버지와 같이 안방에서 잠을 잤는데 아버지가 자주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려 소리를 지르며 깨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때는 무서운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아버지가 퇴직 후에는 그런 증상이 없어졌고 젊었을 때 날카롭던 인상도 퇴직 후 부드럽게 변하신 걸 보고 아버지의 젊은 시절 직장 생활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가장이 짊어진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욕심도 없고 성품이 부드러우시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시는 분이었는데, 아버지의 직업은 본인의 성격과는 반대로 해야 하는 상황이 있는 일이어서 아버지 마음은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신 것이다.
결국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퇴직하셨고 경제적으로는 우리 집은 타격을 받았지만 그 뒤의 아버지의 마음은 편안해지시고 표정은 정말 부드러워지셨다.
괴로운데도 가족들 부양하느라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에 그렇게 오래 다니신 아버지가 나에게는 진정한 영웅이다.
아버지는 예술적 감각도 탁월하셨다. 젊었을 때도 서예를 잘하시고 필체가 좋으셨는데 직장에 다니시느라 바빠서 못하시다가 노년에는 제대로 서예와 그림에 집중하셨다. 많은 대회에서 입상하셨고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내가 결혼할 때 아버지는 붓글씨로 신사임당이 친정어머님을 생각하고 쓴 사친시를 한자로 써서 족자를 만들어 나에게 주셨다. 신사임당이 서울에 있는 시댁에서 살기 위해 친정인 강릉을 떠나서 어머니를 그리는 내용인데, 결혼해서 좋아서 신랑에게 떠나가는 철없는 나와는 달리, 오히려 아버지가 나를 떠나보내며 그리는 애틋한 감정이 이입되어 있었다. 내가 나이가 든 지금 다시 그 작품을 보면, 아버지의 허전한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서 울컥하게 된다. 나의 집 거실에는 언제나 그 족자가 걸려있다.
내가 아쉬운 것은 아버지 호인 ‘효재’의 이름을 딴 서예 전시회를 열어드리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결국 생전에 해드리지 못했다. 그렇게 사랑을 주셨지만 자식들은 결국 이기적인 존재인 것이다. 자식들은 아버지 작품을 나누어서 집에 걸었을 뿐이다.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명예와 찬사를 받게 해 드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서예 활동이 만년의 아버지의 시간을 충만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연세가 드시고 노쇠해진 아버지를 잘 정성껏 보살펴드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말없는 분이라고 단정 짓고,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엄마와만 이야기를 하고 온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 몇 년간은 아버지랑 이야기도 많이 하고 손도 잡아드리고, 우리 아이들도 외할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며 안마해 드리고 했을 때 아버지도 과거 어느 때보다 말씀을 많이 하시고 많이 웃으셨던 것 같다.
막내딸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주위분들에게 말씀하셔서 기뻤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병원에 모시고 갔을 때, 아버지 손이 너무 차가워서 몇시간이고 계속 잡고 녹여드렸다. 그 때 아버지가 내 손을 여러 번 꼭 잡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작별 인사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