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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Mar 06. 2023

남편의 정년퇴직을 바라보며

페르소나를 벗는 그대에게

     

남편이 정년을 맞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지인이나 친구들에게서 남편이 퇴직 후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게 되었을 때 힘든 점이 많다고 들어서 나도 겁이 났다.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다가 갑자기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남자들은 쉽게 모드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던 때에 받았던 대접을 기대하기 마련이어서 밥상이 초라하거나 아내가 집을 비우면 섭섭해한다고 한다.

퇴직 초기에는 자유로움도 만끽하고 친구들도 만나지만 결국 집에서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데, 업무 없이 만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남자들은 한동안 마음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그즈음에 남편이 꿈을 꾸었다.

“사우나이거나 찜질방쯤 되는 장소의 간이침대 위에, 여러 사람들이 누워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끔찍하게도 그 사람들의 얼굴 피부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벗겨져서 해골같이 보이는 상태였다. 그들에게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더 좋은 새로운 얼굴을 가지려고 기존의 얼굴을 벗겨낸 것이라고 하며 새살이 돋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공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실제 자신의 마음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보이는 측면을 ‘페르소나’라고 하는데 이것을 상황에 맞게 쓰고, 자신의 실제 마음과 분리해서 볼 수 있다면 심리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페르소나를 제때에 제대로 발달시키지 못한다면 OO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막 사는, 책임감 없는 어른이 될 터이니 그것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과 인생을 균형에 맞게 운영하여 페르소나를 벗을 기회를 자주 가진다면 탄력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진심을 전달하는 일이 어렵지 않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만 하며 가면을 벗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 사람에게는 페르소나 자체가 자신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나의 남편의 꿈에서처럼 가면이 들러붙어 얼굴과 분간이 안되어 떼어내니 살까지 뜯어지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60세 이상의 아버지 세대가 바로 그런 세대이다. 많이 일하면 가정에 돈을 많이 가져다줄 수 있다는 생각에 일만 하다가 가족과 친해지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퇴직 후에 가족들과 친해지려 해 보지만 실망하고 멀어진 사람들은 그들을 끼워주려 하지 않는다.

꿈에서 준 메시지는 다행히 새살이 돋는다고 하고, 그러면 피부가 더 좋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여자들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전업 주부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회망이 든든하다. 하소연할 수 있는 친구들도 많고 엄마나 언니 같은 가족에게 심적으로 의지할 수도 있는 반면에, 남자들은 자신의 약점을 솔직히 드러낼 존재가 많지 않다.(운이 좋은 경우 아내에게는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소수 있다.) 길게 이어온 취미 활동도 변변히 없어서, 갑자기 할 일 없이 비어있는 시간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흔히 남편이 돈 이외에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내들이 있지만, 자신이 온 시간을 투자해서 번 돈을 어떤 사람에게 가져다준다는 의미는 그가 그 사람을 자신보다 사랑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의 전 생애를 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도 젊을 때는 남편에 대해 불만도 많고, 내가 당하는 일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남편도 인생에서 포기한 것이 나만큼 많다. 그도 일하느라 싱그럽던 젊은 모습을 반납했고, 아이들 교육비가 많이 들 때는 돈이 드는 취미 생활도 접었고, 일생 가족을 안정적으로 부양하려고 노력했다. 직장에서도 그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 방법이 다 옳지는 않았지만 아들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를 세심하게 보살펴드리느라 나를 힘들게 하였으나, 반대로 그가 어머니에게 무정한 사람이었다면 그것은 더욱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퇴임식을 마치고 오는 날, 아들들과 나는 직장에서 평생 쓰던 자신의 방이 없어져서 서운할 남편에게 새로운 방을 꾸며서 선물하기로 했다. 힘센 아들들이 빈 방의 쓰지 않는 짐들을 내다 버리고, 아빠를 위해 책장을 사 왔다. 그가 평생 보았던 책들을 박스에 넣어 가져와서 책장에 꽂고, 책상을 놓아 그의 방을 정성껏 꾸몄다.

그는 아직도 직장에서 묻은 때를 못 벗은 꼰대이고, 대화할 때 눈치라고는 없는 사람이지만,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한 그가, 아름다운 본연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나는 옆에서 오랫동안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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