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호 선수의 피칭을 계속해서 보고 싶습니다
복학 이후 첫 두 학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야구장이었다. 고척에서 열리는 키움과의 원정 경기를 보러갈까 했다가 마침 친한 친구가 주말에 롯데와 두산의 경기를 보러가자고 제안해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본 야구 경기는 랜더스가 아니었다.
벌써 팀 이름이 바뀐지도 3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랜더스라는 이름이 어색하다. 아직 대부분의 선수들이 와이번스 시절부터 계속 뛰어오기도 했고, 우리의 가장 찬란했던 전성기는 문학 야구장이라는 이름을 단 홈구장에서 갈색이 아닌 검정색 흙 위에서 펼쳐졌던 와이번스 시절이니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적인 업셋 우승을 이뤄냈던 2018년 때도 와이번스였고, 살면서 가장 야구를 열심히 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팀은 창단 이후 제일 못했던 2020년도 와이번스였다. 그렇다고 지금의 랜더스 체제가 싫다는 건 아닌데, 팬으로서 어렸을 적의 추억은 대부분 와이번스로 형용되기에 무언가 중요한 짐을 두고 온 듯해 괜히 마음이 무겁다.
작년 전역 이후 호기롭게 보러 간 문학 롯데전 이후로 직관 7연패를 기록 중이고, 오늘(5/21) 두산과의 원정 경기도 시작부터 선발이 무너져 8대2로 끌려가다 9회에 최정의 쓰리런 홈런과 타선의 집중력에 힘입어 4점을 따라잡았고, 그렇게 끝까지 추격할 수 있을까 기대하던 찰나 경기 내내 잘해주던 김민식의 병살타와 함께 게임은 8대6으로 졌다. 이번 시즌 시작부터 선발진이 거의 붕괴되다 싶이해서 오늘 경기도 그다지 기대하지 않기는 했지만, 선발로 나온 이건욱이 4이닝 8실점을 내준게 너무 큰 패인이었다. 비록 졌지만 최정이 3루타 제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데다가 총합 5출루라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고, 그덕에 9회에 끈질긴 추격전을 보여준 덕에 경기 자체는 마지막에 긴장감을 놓을 수 없어 상당히 재밌었다.
경기가 흥미진진하기도 했지만, 오늘 경기가 무엇보다 좋았던건 경기가 8대2로 끌려간 탓에 패전조가 등장하면서 오랜만에 박민호가 던지는 모습을 직관으로 볼 수 있던 거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코로나가 창궐해서 마땅히 밖에서 뭔가를 하지 않았던 시기에 우리 팀 경기를 가장 열심히 봤는데(과장 안 보태고 정규시즌의 경기의 거의 대부분을 라이브나 직관을 통해 봤다), 당시 완전히 무너진 팀을 지탱해주던 불펜의 핵심 중 하나가 박민호였다. 그 직전 년도부터 기량이 만개해서 팀의 필승조로 자리잡았지만, 불행하게도 19년엔 뒷심이 부족한 탓에 팀 성적이 곤두박칠쳤고, 20년은 투타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 9위, 와이번스에서 랜더스 체제로 넘어간 21년에도 선발진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탓에 6위, 내가 기억하는 박민호의 전성기는 우리 팀의 찬란했던 기억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겹쳐있진 않았다.
그러다 군대에 간 이후 야구 경기를 라이브로 보지 않고 경기 결과만 확인하게 되면서 우리 팀의 성적이 어떤지, 누가 활약하고 있는지는 알아도, 매경기 누가 나오고,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둔감해졌는데, 그동안의 혹사의 영향인지 22년부터 급격하게 기량이 하락해 1군에서도 나오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게 2년동안 이어지면서 급기야 작년 시즌이 끝난 이후 은퇴까지 고민했다가 주변 사람들의 설득에 마음을 다잡았고, 이번 시즌 2년 만에 승리투수가 됐는데, 바쁜 일상에 시달리느라 야구를 결과만 확인하고 다닌 탓에 지난 2년이 그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는 걸 늦게 알게됐다.
그런 배경을 알게된 후, 원래도 좋아했던 박민호 선수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졌는데, 이전에는 필승조로서 팀의 승리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기대했다면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꾸준히 마운드 위에 올라오는 수준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됐다. 뭐라고 할까, 이전에는 기량이 좋지 않아 경기 중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느그가 프로가"하는 반쯤 분노에 가득찬 감정이 올라오고는 했는데, 이미 살면서 5번의 우승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누그러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비록 오늘 경기가 초반부터 대량 실점을 한 탓에 패배했지만, 막바지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격하면서 상대팀을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그 뒤에는 큰 점수차로 지고 있는 상황에 등판해 2이닝을 막아준 박민호 선수의 존재가 있었다. 올시즌 그의 성적 9경기 10 2/3이닝 평균자책점 0.84,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나게 훌륭한 성적이지만 야구를 많이 본 사람들이라면 저 수치가 유지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안다(실제로 FIP는 4점대였다). 오늘 그 자리에서 그의 피칭을 지켜본 내가 느끼기에도 여전히 제구가 잘 되는 것 같지 않았고, 아웃이었던 것들 중에서도 자칫 운이 조금 안 좋았더라면 장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게 여럿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세이버메트릭스를 자주 보는 것의 가장 큰 문제라면 겉으로는 잘해보이는 선수의 성과 뒤에 운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작용했는지를 잘 알게되면서 생겨나는 회의적인 태도가 아닐까. 잘하고 있는 선수를 온전히 잘한다고 평가하지 않는 비관적인 마인드.
시즌이 지날수록 그의 방어율은 필연적으로 올라갈거고, 평범한, 혹은 그 이하의 불펜 투수의 지표로 평균이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대체 선수보다 얼마나 많은 승리를 기여했는가의 숫자놀음과는 상관없이, 한때 야구 인생의 깊은 내리막을 경험했던 그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운드에 서줬으면 좋겠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팀의 승리를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선수는 최정과 김광현이었지만, 모두가 팀의 스타로서 활동하면서 커리어 이후 모두가 기억하는 번호를 남길 수는 없다. 비록 치열한 경쟁을 뚫고 프로라는 세계로 들어온 이후에도 평범한 선수 그 이상의 업적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런 특별했지만 평범해진 선수들의 존재가 야구라는 일상을 견고하게 지켜준다고 믿는다.
한 해 정규시즌으로 겨우 17 경기를 하는 풋볼, 전체 선수가 15명에 불과하고 코트에는 5명이 뛰는 농구와 달리 야구는 봄부터 가을의 끝까지 144경기(메이저리그는 162경기)를 하기에 더 많은 평범한 선수의 존재를 필필요로 한다. 모든 경기에 김광현, 야마모토 , 콜이 등판할 수 없고, 모든 타석에 오타니와 저지가 들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100 경기 넘게 누적돼 선수들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지만, 동시에 한 순간에는 정말 평범한 선수들도 오타니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게 야구의 가장 큰 묘미라고 생각한다. "승리"에 가장 많이 "기여"하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건 슈퍼스타일지 몰라도, 야구의 대부분의 순간은 그렇지 못한 비교적 평범한 선수들에 의해 진행된다.
프로의 영역에 들어선 것부터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평범함을 뛰어넘었지만, 최고의 재능끼리 경쟁하는 무대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해야하는 평범함, 수없이 이어지는 경쟁 속에서 살아가면서 항상 누군가를 앞질러 갈 수 없는 순간을 마주할 때의 감정은 우리의 삶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지 못한 순간이 삶이 마지막이 아니듯이, 야구 선수는 자신의 기량과 관계 없이 출전하는 순간 이닝을 끝내거나 점수를 낸다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경기에 임해야 한다. 비극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면 지는대로, 못하면 못하는대로 끝까지 이어나가야 하는게 야구고, 삶이다.
그런 점에서 박민호 선수가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운드 위에 오르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 비록 0점대 방어율이 깨지고, 중요한 상황에서 실점해 팀의 승리를 지켜주지 못하거나 추격의 불씨를 살리지 못하더라도, 그가 공을 던지는 순간들이 최대한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박민호 선수가 이 글을 보지는 않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만큼 오랫동안 마운드에서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팬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줬으면 한다. 난 박민호의 야구를 계속해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