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날
눈부시도록 화창한 날
잿빛 청설모 두 마리가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먹이를 찾느라 분주히 바쁘다. 근처 공원에서 마주쳤던 청설모에 비하면 색도 짙고 덩치도 커 보이는 게 동작이 매우 민첩하다. 숲길에는 속이 꽉 여문 도토리가 여기저기 사방으로 사람들의 손길을 피해 떨어져 있고 청설모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날쌘 몸짓으로 먹이를 찾기 바쁘다. 몇 걸음 더 나아가니 소나무 위에서 흑색빛의 까마귀 두 마리가 까악 까악 울어대는 게 보인다. 어찌나 울음소리가 큰지 그 소리에 고갤 들어 소나무 위를 다시 보게 된다. 큰 소리에 걸맞게 몸집도 큼직한 게 주변 건물에서 보던 까마귀와는 사뭇 다른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딸과 오른 산행길, 자연의 빛깔은 햇빛에 반사되며 다채로운 생명을 안고 다가온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 가을의 깊이만큼 익어가는 날
산행을 위해 숲길을 따라 올라갔다.
허리 부상 뒤 처음 하는 산행은 조심스러웠지만 이처럼 맑은 날 오르지 못하면 안타까울 것 같기에 버팀목이 되어줄 등산 장비 스틱을 챙기고 물도 챙겨 배낭 하나 짊어 메고 딸과 함께 산으로 향했다.
숲으로 들어서면 키 높은 나무의 움직임 따라 달라지는 햇살 아래, 일렁이던 그림자는 물결을 이며 출렁출렁 파도를 그린다. 행복이 깃든 시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숲이 보내는 따스한 기운 그대로를 느껴본다.
느린 걸음으로 오르는 산길, 딸과의 수다가 이어지고 멀지 않은 정상까지의 거리가 더 짧게 느껴졌다. 나무계단으로 이어지는 산행길, 꼭 붙잡은 양손 스틱만큼 불안한 내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나 긴장된 마음을 풀어가며 숨 들이쉬기를 깊이 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내딛는 발걸음에 바스락거리는 색색의 낙엽 밟히는 소리에 더해 산세 또한 험준하지 않아서 고즈넉한 숲길을 따라가던 느릿한 발걸음은 힐링이었다.
바람마저 차갑지 않아 산행하기엔 안성맞춤이었던 날, 성곽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조금 더 가파르지만 그래도 완만한 편이라 정상까지는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드디어 남한산성의 성곽이 보인다.
남한산성 나지막한 성곽 너머 탁 트인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오니 마음마저 상쾌해졌다. 시원하게 펼쳐진 산성 아래의 풍경을 바라보며 찰칵찰칵 한 장의 추억도 남기고 잠시 휴식도 취했다.
그때 딸아이는 TV에서 방영 중인 ‘인연’이란 드라마 얘기를 꺼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전하던 곳으로 잘 알려진 남한산성은 딸에게도 꽤 흥미로웠는지 남자 주인공의 얘기며 이곳 산성과 얽힌 드라마 내용을 풀어내었다.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산성의 발자취를 따라 계속 이어지던 대화는 점심 맛집을 찾는 것으로 수다가 이어졌다.
집을 나서며 둘 다 먹은 건 사과 하나씩이라 허기가 밀려왔다. 우리는 한정식을 먹기로 결정하고 딸은 맛집 리뷰도 찾아보며 한 곳을 보여주었는데, 뭔들 맛이 없으랴마는 평도 좋고 사진 속 정갈한 반찬도 식욕을 돋워 서둘러 그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산성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평일인데도 산행 온 사람들로 꽤 붐볐다. 딸과 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남한산성 북문길을 향해 걸어갔다. 북문은 아직 공사 중이라 분위기는 어수선했지만 조금 더 내려가면 먼저 카페와 식당들이 손님맞이에 바쁜 모습을 볼 수 있다.
점심을 먹기로 하고 찾은 곳은 더덕과 다양한 나물이 가지런하게 나오는 맛집이었다. 시장기가 돌았던 우리는 공복을 채워줄 감자부침, 두부 부침으로 먼저 젓가락질하며 맛을 보았다. 깔끔한 맛이 목 넘김도 좋았다. 창이 보이는 뒤로는 텃밭도 보이고 자연을 품고 있는 곳이라 먹는 즐거움도 두 배가 되었다.
긴장된 마음도 허기진 배를 달래주니 이완되는 듯 풀어졌고 산행의 끝에 먹는 밥맛은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산행하기 전 두려웠던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져 점점 달라지는 몸의 변화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