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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Nov 11. 2022

너의 결혼은 나의 가을이다

쌀쌀해지던 날씨가 조금 풀렸다. 늘 입던 두터운 점퍼 대신 가벼운 외투를 입은 날. 날은 풀렸는데 감기는 오는 중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따끔했다. 이럴 땐 이 음식. 점심으로 뜨끈한 불고기 전골을 해 먹었다. 양파와 팽이버섯, 알배추를 넣고 끓인 전골은 가을과 겨울의 중간에 있는 몸을 풀어주었다. 혼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영화도 빠질 수 없다. 불고기 전골을 먹으며  본 영화는 '폴링 포 크리스마스'. 기억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는 주인공의 사랑이 이야기가 산타를 잊고 지낸 내게도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바라게 만들었다.


전골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면서 문득, 지독하게 사랑하고 싸우는 걸 반복했던 예전에 만나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이제 20대 초반에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게 된 나이. 언젠가 혹은 이미 그 사람도 결혼을 하겠구나. 어쩌면 이미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얼떨떨 해졌다. 사랑을 약속하고 함께 그렸던 미래를 내가 아닌 누군가와 이룰 것이라는 생각에도 덤덤한 스스로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정말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랑에 성공했다는 상상을 하니 나를 옭아맸던 긴긴 가을이 끝나는 기분이 들었다. 운명의 상대는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운명 따위는 없다고 말했던 그를 만나며 운명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이 성공한다면, 어쩌면 운명이란 정말 존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따뜻한 미래를 함께 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무뚝뚝하고 다정한 사람이 하는 사랑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게도 말해주고 싶다. 사랑은 정말 존재한다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의 연애기간. 헤어진 지 5년째이지만, 나는 아직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를 만나든 나도 모르게 그와 비교하게 된다. 서툴었던 첫 연애가 모든 사랑의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랑의 시작을 망설이게 한다. 연애는 그렇게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암시로 그를 완전히 잊는 걸 거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처음 몇 년간은 큰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원망했다. 꿈에서라도 그가 나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멍하게 있다가 들려오는 사랑 노래에 남들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영화라도 보는 날엔 우리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 울면서 잠들기도 했다. 지독한 후유증이었다.


지금도 나는 사랑에 회의적인 편이다. 누군가 나를 또다시 그렇게 사랑해 주리라는 자신이 없다. 그만큼 사랑해줄 자신도 없다. 사랑이 자리한 곳에 아픔이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사랑을 표현할 줄 몰라 화를 내던 그 시절의 내가 또다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주저하게 된다. 그 사람의 결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가 결혼을 했더라도 더 이상 내게 타격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나는 그 시절의 사랑을 영원히 그리움 속에 묻어둘 준비가 되었다. 가을이 생일이었던, 첫 만남이 가을이었던 너를 영영 그 시절의 가을에 묻어두고 겨울로 가겠다.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더는 떨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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